한창 진로 고민을 하던 당시 내 가슴을 뛰게 만들던 두 단어였다.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다가 힘에 부쳐 그만두었던 그 당시 나에게 절실했던 것은 일과 라이프가 잘 분리된 안정된 직장이었다. 달리 뭐가 하고 싶지도 않은데다 객관식 시험에 자신이 있던 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운 좋게도 그리 길지 않은 수험생활을 거쳐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워라밸의 한계
처음 임용되고 혼란스러웠던 적응 기간이 지나자 그토록 바랬던 워라밸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딱딱 지키며 적지만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으로 퇴근 후 내 시간을 맘껏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취미 부자가 되어 댄스, 만들기, 독서모임, 영어회화모임 등 다양한 활동들을 했고 여러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지만 취미 활동을 아무리 많이 해도 자기 만족에만 그칠 뿐 나의 커리어나 연봉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다보니 금새 시들해지곤 했다. 그리고 아무리 퇴근 후가 즐겁더라도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근무 시간이 지루하다보니 인생 전체가 무기력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안정성의 늪
근무를 하며 좋은 공무원 롤모델도 많이 만났지만, 복지부동하는 공무원 선배들을 만나곤 했는데 내가 정말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자기 발전도 없고 그저 시키는 것만 소극적으로 하는 삶. 심하게는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위만 부리려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공무원 사회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던 어느 순간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안일한 그들의 모습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말았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는 귀찮고 하기싫은 일이라는 인식을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자 스스로가 싫어졌다. 안정성과 고용보장이 주는 안온함이 분명 있지만 거기에 만족해버리고 자기 발전을 멈춰 버리면 거기서 얼마나 사람이 못나질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주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내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재미가 없어졌다. 마치 인생 결말을 스포일러 당한 느낌이랄까. 틀이 정해져 있는 업무와 미래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스포일러 당한 재미 없는 영화를 끝까지 볼 것인가, 아니면 결말을 모르는 새로운 영화를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