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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M경비지도사 Apr 17. 2024

<국방일보에 실린 어머니의 편지>

육군 특전사 황금박쥐 부대, 국방일보 1995년

  1988년인가,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의 지시로 단체 위문편지를 쓴 적이 있다. ‘국군 장병 아저씨께’ 라는 제목으로 같은 반 아이들이 다 같이 위문편지를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그런 편지를 받고 기뻐할 군인아저씨가 과연 있었을까,     

 1980년대에는 편지를 쓰는 게 당연한 소통 수단이었지만 요즘에는 다양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되어 손편지를 쓰는 일이 매우 드물다. 그래도 손으로 쓴 글씨, 육필 원고 등을 보면 프린터 인쇄물과는 다른 의미와 정성을 느낄 수 있다. 1995년, 김건모의 노래 ‘잘못된 만남’이 전국을 휩쓸던 그 시절에 나는 육군 일병이었고, 매주 수요일마다 하는 정훈교육 시간에 내가 쓴 시가 우리부대의 대표 작품으로 선정되어 국방일보에 실린 적이 있다. 

<1995년 국방일보에 실린 '어머니의 편지'>

  내가 입대할 당시에 복무기간은 26개월이라서, 입대한 시기의 계절을 3번 보내야 전역을 할 수 있었다. 1994년 12월에 입대해서 1997년 2월에 제대했으니 군대에서 겨울을 3번 보냈고, 그 시절 추위에 떨던 경험으로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겨서, 지금도 추운 것을 무척 싫어한다. 추운 겨울에 논산 훈련소로 입소할 당시에 나는 사귀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함께 훈련받는 동기들이 애인이랑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기도 했었는데,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를 떠날 때가 되어, 각자의 군장을 싸들고 연병장에 모여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연락병한테 마지막 편지묶음을 전달받은 조교가 편지를 들고 한 명씩 호명했다. 

“82번 최문섭!”

순간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닌가 했었는데, 나에게 온 편지가 맞았고, 보낸 사람은 내 어머니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니의 편지를 훈련소를 떠날 때가 되어 연병장에 모여있다가 받아보게 된 것이다. 일반 우편봉투에 담긴 편지지 안의 첫 문장은 “사랑하는 아들, 문섭 보아라” 였다.  그 편지를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 눈물을 찔끔 흘렸던 기억이 있었기에 ‘어머니의 편지’라는 짧은 시를 쓸 수 있었고, 내가 쓴 시가 영향력있는 주요 일간지인 국방일보에 실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나보다 늦게 군대에 갔던 형이나 동생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셨다. 아들을 군에 보내는 경험이 처음이었던 어머니가 나한테 편지를 썼던 것이다. 나보다 2년 먼저 태어난 형은 내가 제대하고도 한참있다가 입대했으니, 아들의 입대와 전역을 한 번 겪어 본 어머니는 더 이상 펜을 들지 않아도 될만한 경험치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편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항상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나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여자들인데, 지금은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가끔씩 궁금해진다. 영화 ‘건축학개론’ 이 끝나갈 무렵 엄태웅이 한가인한테 물었다.

“왜 날 찾아온거야? 집 지어줄 사람이 그렇게 없었어?”

그러자 한가인이 답했다.

“그냥, 궁금해서, 궁금해서 그랬어. 잘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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