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남겨진 사람들의 밤"
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날이 흐렸어. 어젯밤부터 공기 중에 비 냄새가 희미하게 맡아지더니 결국 오늘은 온종일 비가 내리는구나.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네 생각이 많이 나.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서 옷을 덮어쓰고 달리던 날 기억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는데 편의점에서 산 투명 우산이 뒤집어졌잖아. 비에 몸이 젖기 싫어서 인상을 찌푸린 나를 보며 너는 장난스럽게 웃었고, 내게 손을 내밀었고, 네가 입고 있던 셔츠를 우비처럼 뒤집어쓰고 막 달렸지. 비 오는 날을 무척이나 싫어하던 나였는데 그날부터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싫지 않았어.
우리의 아지트가 되어버린 네 자취방에 앉아 창밖에 은은히 들리던 빗소리를 듣던 것도 빼놓을 수 없지. 수중에 돈이 없어 가장 작은 방을 구했지만, 그 방에 있을 때 너는 아주 큰 사람이 된 것만 같았지. 꼭 쓰고 싶다던 연애 소설 이야기나 벌써 10권이나 팔렸다던 두 번째 시집 이야기를 할 때나, 볼펜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생각해두었던 이야깃거리를 꺼내놓을 때면 너는 아주 근사한 사람이었고, 나는 꿈속에 젖은 듯한 네 옆모습을 보며 참 좋았던 것 같아. 생각난 김에 내일은 네 방에 들러야겠다. 네가 쓰던 소설도 다시 한번 보면 좋을 것 같아. 운이 좋으면 빗소리를 들으며 네 소설을 읽을 수 있겠지.
비가 온다는 핑계로 자주 찾던 단골집 기억나? 거기는 김치전이 특히나 맛있었잖아. 기본 안주로 나오는 오뎅 세 개 들어있는 오뎅탕도 좋았어. 우린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막걸리 한 주전자, 김치전, 오뎅탕을 앞에 놓고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나누었지. 학생 땐 쑥맥이던 위진이가 얼마 전 결혼식을 올린 이야기나, 연우가 5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어한다던 이야기를 나누며 긴긴 밤을 지새웠지. 모든 손님들이 다 나가고, 나이가 지긋한 주인 할머니께서 "아가, 이제 문을 닫자" 하시면 "네" 하고 값을 치르고 나왔지. 깜깜하고 축축하게 내려앉은 새벽길에서 우리는 집에 들어가기 싫은 아이들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또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때를 떠올리면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었나 싶어. 그냥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했고, 며칠 전 들었던 뉴스 속 비극 이야기를 하였고,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던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시간은 우리를 지나쳐 흐르는 것만 같았지. 그렇게, 그 시간에 머물러 있고만 싶었지.
언제부터였을까? 너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 펜을 쥐면 너는 모든 것을 가져서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점점 펜을 쥐지 않는 날이 늘어만 갔지. 피곤에 찌든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너에게 슬그머니 펜을 쥐어주었지만, 방바닥에 가차 없이 던져버리며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고 짜증을 냈지. 내가 좋아하던 너의 얼굴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는 듯, 허공에서 도시 한 개를 멋지고 근사하게 그려내는 얼굴이었는데 너는 점점 현재에 찌들어만 갔고, 얼굴에서 빛을 점점 잃어만 갔어.
아마 그날부터였을까? 네가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 말이야.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우리가 현재를 모른 척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지. 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너는 일용직 노가다를 시작했지. 옛날 책방 냄새가 짙게 나던 너에게서 흙냄새와 땀냄새가 뒤섞여 나기 시작했고, 하얗던 얼굴이 까맣게 타기 시작했지. 그래도 나는 괜찮았어. 너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도 그건 재우 너였고, 햇빛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려도 너는 너였지. 하지만 너는 하루 일을 하면 하루를 쉬어야 할 정도로 허리와 다리가 좋지 않았고, 자주 다쳤지. 어느 날에는 벽돌을 나르다가 계단에서 굴러 한참을 누워 있어야만 했고, 또 어느 날에는 발목을 크게 접질려 절뚝거리느라 화장실도 겨우 갈 정도였지. 그래도, 나는, 정말, 괜찮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푼돈이나마 꾸준한 수입이 있었고, 그 푼돈으로도 우리는 근사한 미래를 그려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벽을 보고 모로 누운 너의 어깨가 점점 처지던 것을, 나는 사실 모르지 않았어. 모른 척해야만 했지.
내가 일하던 편의점은 번화가 한가운데에 있는 규모가 꽤 큰 편의점이었어. 처음에는 무섭기만 하던 주취자가 더는 무섭지 않게 되었을 때 결국 사건이 터졌지. 그날 편의점에 들어섰던 주취자는 이미 화가 난 상태였어. 일행으로 보이는 세 명이 술에 잔뜩 취한 채로 편의점에 들어왔고, 소주 한 병을 깨트렸고, 그 소주병을 둘러싸고 싸움이 시작되었고, 다른 손님들이 그들을 무서워하는 게 내 눈에 보였지. 끝내 고성이 오가며 서로를 밀치기 시작했고 싸움이 커지겠다 싶어서 중간에 끼어들어 싸움을 중재했을 뿐인데, 그저 싸움을 말렸을 뿐인데. 잠깐 사이에 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편의점 손님들은 소리를 질러댔지. 바닥을 흥건하게 만드는 피가 내 목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을 만큼 목을 깊이 베인 건 아니어서 소독만 하고 퇴근을 했지. 문제는 내가 주취자들의 싸움을 말리느라 다쳤고, 목에 큰 상처가 생겼고, 편의점 점주는 그런 부정적인 사건에 휘말린 내가 계속 편의점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어. 한마디로 6개월을 다닌 편의점에서 잘리게 된 거지. 그때마침 너는 발목을 삐끗하여 집에서 쉬고 있을 때라, 한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어. "재우야, 우리 오랜만에 월하에 가서 막걸리나 마실까" 내가 묻자, "네가 다쳤으니 나라도 일을 나가야 해" 하고 말했고, 합의금으로 받은 푼돈이 내 손에 있으니 걱정 말라며 웃었지. 웃는 나를 보며 너의 눈빛이 흐려지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해. 너는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며, "병신같이 웃지 좀 마" 하고 말했지. 나는 그저...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너는 절뚝거리며 집을 나가버렸어.
지금 생각해봐도 나는 정말 모르겠어. 대체 뭐가 그렇게 너를 힘들게 한 거니? 내 목에 난 상처가 너를 힘들게 만들었니? 아니면 여기저기 다친 너의 몸이 서러웠어? 그것도 아니라면... 한치 앞도 알 수 없었던 깜깜하고 막막한 우리의 미래... 때문이었을까. 나는 너만 내 옆에 있으면 그 무엇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었는데. 손에 쥔 푼돈이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라도, 그저 너와 옥수수 한쪽을 나눠 먹는다 해도 정말 남부러울 게 없었는데. 함께 눈을 맞추며 웃던 너는 어디로 간 건지.
며칠 동안 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 차갑게 꺼진 전화기가 며칠 동안 켜지지 않았지. 생활 반경이 넓지 않은 우리가 자주 가던 곳은 거기서 거기, 대충 정해져 있었는데도 나는 한참 동안 너를 찾을 수 없었어. 내가 모르는 너의 모습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그때 깨달았지. 네가 돌아오지 않았던 첫날 밤, 나는 막걸리를 사다 놓고 너를 기다렸고, 둘째 날 밤에는 홀로 그 막걸리를 마셨고, 셋째 날부터는 그저 현관문만 보며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지. 아마,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너의 집 현관에 앉아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개가 된 심정으로 너만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재우야, 이젠 힘들지 않니? 아프지 않아? 모로 누워 깊이 한숨을 내쉬던 어깨라도 한번 토닥여줄걸. 펜을 집어던지는 너의 모습에 놀랐어도, "병신같이 웃지 말라"고 짜증을 내는 말에 상처를 받았어도 너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봐줄걸 그랬나 봐. 후회는 가장 늦게 찾아오는 감정이라더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기억 속 너를 더듬으며 미안한 감정을 갖는 것밖에 없어. 미안해, 너의 마음을 몰라줘서. 그냥 다, 내가 무조건... 미안해.
보내지 못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네 생각이 날 때마다 편지를 써. 비가 오는 날에 편지를 써. 막걸리가 먹고 싶은 날에 편지를 써. 우연히 들려오는 네 이름에 편지를 써. 길거리에 버려진 투명 우산을 보면, 길거리를 지나가다 월하를 지나치면 편지를 써. 요즘 난 편지를 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겠거든.
벌써 20통은 넘게 너에게 편지를 썼는데 아무리 편지를 써도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네가 읽을 거라고 생각하며 편지를 쓰다가도 네가 읽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으면 손가락에 힘이 쭉 빠져.
하늘에서 부디, 네가, 나의 편지를 읽고 있기를 바라며.... 이만 편지를 줄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