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

Chapter 3. "남겨진 사람들의 밤"

by 이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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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들은 이전에 펀딩으로 선보였던 단편소설집 〈결핍〉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입니다.




그대가 꺾어준 꽃 들여다보았네

시든 꽃이 다시 피어날 때까지

이윤학, '첫사랑'



희는 나무 책상에 펜으로 긁어 남겨둔 시를 가만히 손으로 짚어보았다. 평소 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는 이런 시가 있는 줄도 몰랐기에, 이렇게 짧은 글도 시가 될 수 있나,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검정펜으로 나무를 긁어 새긴 이 짧은 시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큰 걸까. 희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 마음을 손가락 끝으로 느껴보았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손길이자, 손때이자,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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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오래도록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놓지 못하고 마음속에 늘 품었던 사람. 그녀 역시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언니의 옆에서 마음이 편해 보이던 사람, 작은 소리에도 놀라 깨는 어린 개 같은 언니를 유일하게 편안하게 만들어주던 사람이었다. 항상 밝은 척 웃던 언니는,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어린 동생을 돌보면서도 항상 씩씩했던 언니는, 남들이 보든 안 보든 눈물을 삼키는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언제나 몸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희는 언제나 밝은 척 애쓰는 언니에게 힘이 되고 싶었으나, 실상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기대곤 했으니 실질적으론 언니의 힘이 되지 못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 동생보다 더 힘이 되어주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도.


"누나, 이제 가자."


희가 책상에 새겨 놓은 문장을 마음에 새기듯 매만지고 있는데 동생 영이 방문을 열곤 희를 불렀다. 희는 "어, 가자."


짧게 대답하곤 책상에 놓여 있던 작은 꽃다발을 챙겼다. 어느새 1년이 흘러, 언니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언니는 입버릇처럼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이런 것도 못 하면 어떻게 해?', '내가 없어도 해내야지' 하고 말하곤 했는데 둘째 '희'와 막내 '영'은 그 말을 여러 차례 들으면서도 언니가 실제로 없어지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렸을 적 여읜 부모님보다 더 큰 존재였기 때문에. 희와 영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던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평생 동안 그 자리 그곳에 있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영아."

"응, 누나."

"언니 보고 싶다."

"... 나도."


희의 말에 짧게 대답한 영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손가락으로 눈을 눌렀다. 희는 영이 눈물을 참으려 눈을 누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에 지나가는 풍경을 의미 없이 두 눈으로 훑었다.


남자는 누군가 채우려고 해도 결코 채울 수 없는 결핍을 가진 사람이었다. 의미도 없는 것을 사들이고, 술을 잔뜩 먹고 취해서 나자빠지고, 똑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던 사람이었다. 언니는 그렇게 공허한 사람 옆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었다. 시간도, 돈도, 사람도, 마음도, 인생도. 희는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따위로 살아 우리 언니를 힘들게만 했냐고.


희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엉망진창인 그 사람을, 언니는 마음으로 이해했다. 밝은 빛으로 그 사람의 어둠을 몰아내주고 싶어 했다. "언니의 밝은 빛이라면 그 사람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 희야." 하던 말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그때 말릴 걸. 처음부터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설득할 걸. 그 사람을 만나 우리 언니와 헤어지라고 말할 걸. 희는 뒤늦은 후회로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이내 그 모든 후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생각이란 걸 깨닫곤 입안이 씁쓸해짐을 느끼며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언니, 그 사람이랑 헤어지면 안 돼?'


희가 울고 있는 언니에게 간절하게 물었다. 언니는 잔뜩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원망하듯이 희를 건너다보았다. 희는 엉망진창인 언니의 얼굴이 미워서, 싫어서, 속상해서, 마음 아파서 더 밉게 말해야겠다고 그 순간 다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너까지 보탤 거 없어.'

'바람 피웠잖아.'

'실수라잖아.'

'언니를 때렸잖아.'

'술 먹었잖...'

'언니! 제발... 제발!'


화가 치밀어 소리치는 희를 멀거니 보던 언니의 얼굴. 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시간 가장 고통 속에 사는 건 언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듯 속에 있는 말을 마구 뱉어냈다.


'그 사람이 다리 다친 거, 언니 때문 아니야! 그 사람이 하는 말, 가스라이팅인 거 모르겠어? 그 사람이 차 사고를 낸 것도, 다리를 절게 된 것도, 다 언니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 사람의 술버릇 때문인 거지! 언제까지 그렇게 병신 같은 새끼 옆에 붙어서 질질 짤래?'


언니는 그 말에 울고 있던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두 손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아내는 그 눈두덩이가 발갛게 부어 올라 있었다. 희는 그런 언니를 달래주고 싶어서, 언니가 그만 울었으면 좋겠어서, 그런 멍청한 새끼 때문에 힘든 게 너무 싫어서 그렇게 말을 했을 뿐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언니는 희 앞에서 울지 않았다. 그 사람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동생 앞에서 우는 것이 그 사람을 욕보이게 하는 일이란 걸 깨달은 그날부터 언니는 그 어디에도 자신의 속내를, 상처를, 기다림을, 노여움을, 아픔을 털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마지막 일기장 같았던 희가 언니에게 화를 낸 그날 이후부터.


"그러지 말걸 그랬나 봐."

"누나 잘못이 아니야."


잠에 들어보려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건만 오라는 잠은 오질 않고 옛 생각만 마음에 남아 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언니를 대하던 많은 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그날에 소리치던 본인이 미워서 마음이 절절하게 끓어올랐다. 가뜩이나 힘든 사람, 힘들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영은 앞뒤 맥락도 없이 후회의 말을 내뱉는 누나의 표정이 곧 울 것만 같아 가방을 뒤적거려 휴지를 내밀며 대답했다. 희는 그런 영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저 이런 상투적인 위로조차 건네지 못한 본인이 미워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내리자, 누나."


언니를 보러 오는 날엔 희와 영 모두 운전을 하지 않았다.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운전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차를 타고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곳에 언니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기차를 택한 이유였다. 두 사람은 한적한 기차역에 내려 말하지 않아도 익숙한 그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힘겹게 떼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추억과, 기억과, 후회와,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 나아가는 속도가 더뎠다.


'언니, 이제 괜찮아?'

'응, 괜찮아.'

'그 사람이랑 헤어졌어?'

'그건 아닌데, 괜찮아. 마음 정리해 나가는 중이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때 이상하게 말갛던 언니의 얼굴이, 모든 것을 털어내려고 마음먹은 사람의 전조 현상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았으면 어땠을까. 언니는 삶의 끈을 놓지 않고 한 가닥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살았을까. 희는 그 순간 언니가 평안해 보이는 얼굴로, 산뜻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한동안 묻지 않았던 남자에 대한 것을 물을 수 있었다.


'언니는, 그 남자가 왜 그렇게 좋아?'

'첫사랑이라서. 그 사람이랑 헤어지면 못 살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언니는 침대에 앉아 옷장에서 꺼낸 옷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안 입는 옷을 좀 버려야겠다며, 차분하게 옷을 개고 있었다. 퇴근한 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땐 언니의 옷도, 신발도, 가방도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니가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마음먹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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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목이 메여 왔다. 뭘 좋다고 그렇게 웃고 있어, 난 언니 때문에 이렇게나 힘든데. 희는 언니가 미워서 잔뜩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눈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딱 한 번만 더 언니를 볼 수 있다면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말해줄 텐데. 옆에 나란히 선 영은 코를 훌쩍거린다 싶더니 어느새 엉엉 울고 있다. 희는 영의 울음소리에 본인은 울지 않으려 노력하며, 집에서 적어온 메모를 웃고 있는 언니의 얼굴 옆에, 언니의 이름이 담긴 유골함 앞에 붙여두었다.



그대가 꺾어준 꽃 들여다보았네

시든 꽃이 다시 피어날 때까지

이윤학,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