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맛있는 걸 먹고, 글을 쓰고, 함께 걷고, 함께 마시고
오늘도 조식으로 시작하는 아침!
오늘의 아침은 젓갈, 김치, 감자채볶음, 떡, 부추겉절이, 육개장이었다.
해외에서도 한식을 챙겨먹는
지독한 한식러버는 아주 보통의 아침밥이 너무나도 좋다.
치앙마이에서 챙겨먹은 아침은
살기 위해 먹었지만
스테이 두루의 아침은 매일 기대된다.
룸메랑 나란히 안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장님께서 직접 싼 듯한 김밥을 접시에 올려주셨다.
김밥 / 비빔밥 / 볶음밥을 좋아하는 내게
김밥은 특별한 선물이었다.
아침을 챙겨 먹고 있는데
스테이 두루 사장님께서 다른 테이블에 앉은 분들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1기에 함께 했던 멤버라며 소개해주셨다.
나는 1기 멤버가 작성한 '순천일기'를
한달 살기 하기 전 브런치로도 읽었고,
이곳에 와서는 책으로도 틈틈히 보고 있었기에
반가운 마음이 훅 끼쳤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쭤봐도 되냐 물었고
'환희'라고 본인 이름을 밝히셨다.
최근에 본 에피소드 중에서
"환희"라는 이름을 봤다고,
책에서만 보다가 직접 뵈니까
연예인 같이 느껴진다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책으로 읽으셨냐며,
오히려 반가워해주셔서
아침부터 들뜬 기분이 들었다.
환희님은 1년 전,
한달살기에 참여했다가
순천이 너무 좋아 정착하셨다고 했다.
나는 이제 고작 일주일 넘게 한달살기를 하고 있지만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환희님과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가
방으로 올라가서는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초대 계획서'와 '아카이빙 계획서'를 부랴부랴 쓰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 끝내야지, 얼른 끝내야지 생각만 하다가
당일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알아보는 모습이
과제를 미루다 마감일에서야 제출하는 대학생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번 초대 프로젝트에 동생들을 초대할 거라
어디에서 묵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았더니
해산물 러버인 막내가 '꼬막'이 먹고 싶다고
딱 집어 말해주어 식당도 고르고,
숙소도 얼른 예약해버렸다.
내가 겪은 순천의 환대와 다정함을
함께 피부로 느낄 수 있다니 벌써 기쁘다.
오늘의 첫 일정은
다 같이 모여서 '점심 먹기'
점심 메뉴는 근처에서 육회비빔밥이 맛있다는 '효동회관'이었다.
희주님께서 가족들이랑 와도 좋을 만큼 맛집이라고 추천해주셨는데,
가족들을 초대하기 전 먼저 먹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좋았다.
가지나물, 연근무침, 미역줄기무침 등 다양한 반찬이 깔리고
신선한 육회가 올라간 육회비빔밥이 나왔다.
나물이 잔뜩 들어간 육회비빔밥이라니.
육회가 최애인 막내가 떠올랐다.
다음 주말에 동생이 오면 여기도 들러봐야지, 생각하며.
다양한 사인이 걸려있었는데,
그만큼 맛집인 모양이다.
다른 메뉴는 못 먹어보았지만
육회비빔밥만큼은 맛있었으니
육회비빔밥을 좋아한다면 한번쯤 가볼법하다.
오늘의 순천 날씨는 맑음.
어쩜 이렇게 좋은 날을 한달살기 일자로 잡았을까 싶게
내내 닐씨가 맑고 화창하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는
지금까지 날씨가 좋은 덕에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기쁘고, 조금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다.
다음 일정은 기록에 대한 강의를 듣기 위해
'차차루' 라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순천 교통 역사 100년의 문화사를 스토리텔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터미널 근처에 있어 이동하기에 편리했다.
아이들이 소꿉놀이 하기에도 좋게 꾸며둔 공간.
10명이 앉기에 충분한 공간이었지만
특강을 들으며 메모를 하는 사람이 많아
약간 협소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진석 작가님의 강의는 인상깊었다.
순천에 와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 하고자 하는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셨기 때문에.
이번 한 달 살기를 하며
개인적으로 만나기엔 어려운 분들을
직접적으로 연결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뜻깊다.
나의 세상이 이렇게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한 곳에서 뿌리박혀 같은 일을 하는 것도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또한
무척 매력적인 일이니까.
나는 사진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카메라가 없어서
그저 휴대폰으로 찍고 넘기는데
작가님께서 찍은 사진을 보니
사진에 대해 배우고 좋은 카메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두 눈으로 담았을 때 너무 좋은 장면을
최대한 비슷하게 담아내고
그걸 다른 사람들이랑 나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스타에서 인상 깊은 몇 가지의 계정도 알려주셨다.
맨홀 뚜껑만 찍어서 매번 올리는 사람과
야외에 있는 의자를 찍어 올리는 사람,
온갖 타일의 패턴에 대해 찍어 올리는 사람 등 다양했다.
아카이빙이란 건 특별한 게 아니다.
그저 나의 취향이 되는 무언가를
꾸준히 올려 10개, 100개, 1000개가 되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한 아카이빙이 된다.
나는 아카이빙이라는 숙제를 가지고
어떻게 남겨야 좋은 기록이 될까 고민했는데
작가님이 말씀하시기로는
'너무 잘'하려고 하면 시작이 어려워진다고 하셨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시작이 중요한 거라고도 말씀해주셨다.
작가님께서 집필하시거나 편집한 책과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여러 권의 책을 함께 보았는데
특히 '고을'이라는 책이 인상 깊어 찍어두었다.
순천 말고도 대전, 부산, 경주, 강릉 등 다양한 지역이 시리즈로 나와있다.
'이웃의 부엌을 여행합니다' 라는 컨셉으로 만든 책이었는데
어찌나 자세하고 매력적으로 기입해두었는지
책을 적어도 '세번'은 보고 구매하는 내 마음에 쏙 들어
당장 구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의 부엌을 여행합니다.
Walk along our neighbor’s kitchen
〈고을goeul〉은 저마다 뚜렷한 사회·문화적 특성과 매력을 지닌 우리나라 지역의 식문화를 여행하는 단행본 시리즈입니다. ‘이웃의 부엌을 여행합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한 지역을 방문해 고유한 역사와 전통, 음식, 제철 식자재 등을 경험하고 풀어냅니다.
식문화를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지역의 모습과 가치를 생생하고 깊이 있게 소개합니다. 〈고을〉을 통해 이웃의 부엌을 여행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님께 아카이빙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듣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오전에 대략적으로 기입해두었던 계획서를
마무리 해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한글 파일로 공유해주셔서
윈도우를 쓰는 사람들은 파일로 제출한 것 같았는데
맥을 이용하는 나는 조금 번거롭더라도 손글씨로 빼곡히 작성하여 제출했다.
이렇게 계획서를 쓰고 나니
아카이빙에 대한 욕심이 조금 더 구체화가 되는 기분.
열심히 계획서를 쓰고 있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18시.
19시부터
근처 '파랑새 창고'에서 진행하는 클래식 특강을 들으러
부랴부랴 몸을 일으켰다.
남원 친구랑 룸메만 가는 줄 알았는데
앨빈과 호균님도 함께 가는 것이었고,
파랑새 창고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 멤버 10명 중에 8명이 신청한 특강이었다.
작은 전시회도 진행하고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는 형태로 구성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저 특강에 참여했을 뿐인데
간식이며 엽서며 다양한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순천에는 이런 다양한 특강들이 많은데
이런 걸 놓치지 않고 함께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특강은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라는 제목으로 진행 되었는데
어떤 감정일 때 어떤 클래식을 들으면 좋은지에 대해서도 추천을 받고
다양한 클래식을 함께 들었다.
클래식은 그저 지루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보니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었고
감정에 따라 음악이 내게 와 닿는 것도 제각각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때론 선으로, 때론 색깔로 표현하고
마지막엔 3분 동안 음악을 들으며
느껴지는 장면이나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셔서 그린 것들.
위의 세 이미지는 각각
나 - 앨빈 - 당근이의 그림인데
사람마다 선도, 색도, 그림도 모두 다르다.
우리가 살아온 길도, 쌓아온 생각도,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모두 다른 것처럼.
어렸을 때는 특별하게 살아야만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고
어른이 되고서는 튀지 않고 평범하게 살기만 해도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천 한달살이를 하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마주하고 나자
특별하다는 것도, 평범하다는 것도
그저 모두 나의 시선에서 비롯된 편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평범한 삶일지리도
그 삶을 살아내는 누군가는 매일매일이 축제일지도 모르니까.
나의 우물이 넓어진다는 건
내 생각이 한뼘씩 자란다는 것이고
생각이 자라난다는 건
나와 다른 걸 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진다는 뜻인 모양이다.
특강이 끝나자 21시.
오늘은 특강을 듣느라 내내 앉아있었기에
운동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는
순천역 근처에 있는 이마트를 가기 위해 길을 나섰고,
마찬가지로 걷는 걸 좋아하는
남원 친구와 서울 친구가 함께 길을 나섰다.
우리는 함께 걸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카이빙에 대한 방식을 공유하였으며
서로가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르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것.
이게 여행의 묘미인걸까.
퇴사 후 집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 마음에서 찰랑거렸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였다.
셋이 우리 방에 모여 이마트에서 사온 모스카토를 한잔 했다.
남원 친구는 조금이라도 술맛이 느껴지는 술을 안 좋아하는데
처음 먹어본 모스카토는 맛있다며 한 잔을 비웠다.
우리는 한국인답게 침대가 아닌 바닥에 앉아
끊임 없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또
나의 세계가 한뼘만큼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