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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 Oct 20. 2021

그루브를 잘 타려면

틀에 박힐 것인가, 신나게 즐길 것인가

 주로 쇼팽, 베토벤 같은 위인급 작곡가들의 클래식 곡을 배우다가 최근에는 재즈에 관심이 생겼다. 클래식은 오른손과 왼손이 모두 악보에 표현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작곡가가 의도한 틀이 존재한다. 

반면 '리얼북'을 비롯한 보통의 재즈 악보에는 오른손의 기본 멜로디만 그려져 있다. 그것을 베이스로 그때그때 분위기와 패턴에 맞춰 즉흥적으로 악보에 없는 반주와 꾸밈음을 녹여낸다. 그 즉흥성과 자유로움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결국 나는 학원에서 유일하게 클래식도 배우고 재즈도 배우는 박쥐 같은 학생이 되었다. 



그루브를 아시나요


 하루는 재즈 레슨을 받는데 내가 재즈의 자유로움에 취해 박자를 제멋대로 쳤나 보다. 초반에는 괜스레 쫄아서 천천히 시작해놓고는, 중반의 손에 익은 부분은 신나서 박자가 멋대로 빨라졌다. 재즈 선생님은 내 말괄량이 같은 연주에 대한 직접적인 피드백 대신 ‘그루브(Groove)’를 아냐고 물어보셨다. 


보통 ‘그루브가 있다’고 하면 음악에 몸을 맡기며 꿀렁거리는 댄서라던지, 악기를 연주하면서 손가락뿐만 아니라 온몸을 같이 흔들며 리듬을 타는 연주자라던지, 그런 속박되지 않은 역동적인 모습들이 떠올랐다. 명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그루비한 일관된 형태가 떠오르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루브는 사실 총기에서 쓰는 용어야." 

내 머릿속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선생님은 몰랐지? 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나는 이전의 당연하다는 표정 대신 의아함 가득한 눈빛으로 설명을 이어나가길 기다렸다. 마냥 음악적인 단어인 줄 알았는데 차갑고 무서운 총기라니. 게다가 그루브의 숨겨진 의미는 더더욱 예상 밖이었다.


총의 방아쇠를 당길 때 총알이 잘 발사되려면 총의 입구에서 빠르게 회전의 힘을 받아야 한다. 그 회전을 주기 위해 총구 안쪽은 규칙적인 나선형으로 촘촘하게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부분의 움푹한 홈을 '그루브'라고 부른다고 한다. 즉, 그루브는 굉장히 규칙적인 것을 일컫는 용어라고.


실제로 우리가 흔히 느끼는 그루브 또한 일정하게 딱 떨어지는 박자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한다. 박자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그루브를 타던 리듬이 깨진다.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얼마나 정확한 박자 안에서 그루브를 타느냐에 따라 프로와 아마추어가 갈릴 정도라니, 부드러운 재즈곡에서 칼 같은 박자는 오히려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그루브가 주는 자유로움과 여유로운 느낌은 '탄탄한 기본'이 바탕이 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groove와 관련된 단어/숙어들


Groove를 영어 사전에 쳐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Groove라는 똑같은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데 어떤 문장에서는 '틀에 박힌'이라는 따분한 감정을 의미하다가도, 어떤 문장에서는 '신나는, 의욕이 생기는'과 같은 열정적인 단어로 둔갑한다. 


그루브처럼 기본이 탄탄해야 여유와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건, 단연 피아노 연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그루브의 의미 또한 그렇다. 다 놓아버릴 것처럼 따분함과 권태로움을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 뜨겁게 열정이 피어올라 글을 쓰는 당장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피아노의 그루브도 내 삶의 그루브도 여유롭게 잘 타는 사람이고 싶다. 

아직은 둘 다 아마추어지만, 느리든 빠르든 차곡차곡 나만의 탄탄한 박자를 만들어나가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오늘은 조금 더 애틋한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러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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