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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 Nov 02. 2021

할아버지와 케이크

가장 진심이었던 선물



 어릴 적 제주도에 5년 정도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노후를 제주도에서 보내셨는데, 할아버지의 작은 농장 한켠에 컨테이너를 집처럼 개조해서 살고 계셨다. 지금이야 제주도 한달살이다 뭐다 하면서 제주도에 대한 사람들의 로망이 만연하지만 그 당시 10살이었던 나에게 그런 로망 따위가 존재할리 없었다. 그저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길도 없는 낯선 동네였을 뿐이다.


 처음 제주도에 내려간 날, 나는 그 컨테이너 집이 싫었다. 낡기도 했거니와 시도 때도 없이 벌레가 날아다니고 창틀에 개구리가 앉아있기도 했다. 그 자연친화적인 집이 그렇게나 무섭고 낯설었다.

 반갑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할머니를 보니 그나마 긴장이 풀렸다. 개구리 울음소리나 들리던 그 집에 우리 자매의 장난스런 웃음소리가 정적을 몰아냈다.

그러다 옆에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따로 밥을 드시던 할아버지가 버럭  마디를 내질렀다.

"귀가 따가버서 밥을 못 먹겠다!"

할머니는 애들이 다 그렇지 그걸 뭐라고 하면 어떡하냐며 핀잔을 주셨지만, 할아버지의 첫인상이 굉장히 무섭게 남아버린 첫날이었다.


 할아버지의 무서웠던 첫인상과는 달리 농장만큼은 우리 자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동물을 좋아했던 나는 토끼와 강아지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사다리를 타고 원두막 위로 올라가 수박을 먹으며 놀다가, 비가 오면 그칠 때까지 낮잠을 자고 내려오기도 했다. 땡볕이 내리쬐는 날에는 잔디밭 한가운데에 에어 풀장을 꺼내 물놀이를 즐겼다.  사방에 물이 튀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자연  한가운데에 우리가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 새파란 잔디밭과 나무들,  옆의 박스 같은 작은 . 처음에 무섭고 싫었던  공간은  그렇게 그림 같은 곳으로  마음에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는 농장 가꾸기에 진심이었다. 빛바랜 빨간 모자와 무심하게 귀 뒤로 꽂힌 모나미 펜은 일하는 할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컨테이너 집도 할아버지가 화장실 수도부터 보일러까지 직접 구축했고, 나중에는 두 손녀가 놀 수 있도록 양옆으로 방이 하나씩 있는 정자도 직접 만들어 주셨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수첩에는 매일매일 농장에 무엇을 했는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물을 주었는지, 어떤 나무를 심었는지, 무엇을 만들었는지... 그런 할아버지를 보면 대단하고 멋지다가도, 집 안에서는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주눅이 들어 어린 나에게는 꽤 오랫동안 눈치가 보이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찍었던 할아버지 농장,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할아버지가 손수 만들고 심은 것들이다.



 시간이 흘러  살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생일날. 그 날은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감정이 뒤바뀐 날이 되었다.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기로 해서 기다리는데, 할머니가 기가 차면서도 행복한 웃음으로 뭔가를 보여주셨다. 케이크였다. 인공적인 맛이   같은 새빨간 체리와 얄쌍한 초콜릿이  박힌 평범한 생크림 케이크.

"너거 할아버지가 사 온 거야. 나 참, 내 평생 살면서 할아버지가 돈 주고 뭘 사 오는 것도 처음 보고, 그것도 케이크를 사 온 것도 처음 봤다."

할머니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더 이상 그 케이크는 평범한 케이크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꽤나 대단한 구두쇠였다. 산 지 10년 넘은 옷이나 신발은 기본, 그렇게 끊기 힘들다는 담배도 돈이 아까워서 아껴 피던 분이었다. 할머니랑 시장에 다녀온 날은 할아버지한테 새로 산 신발을 들킬까 봐 신발장 구석에 숨겨두기도 했다.

그런 할아버지가 직접   케이크라니! 할아버지는 생색도 내지 않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멋쩍은 웃음으로 "남기지 말고  무라!" 하고는 방에 들어가 버리셨다. 어렵기만 했던 할아버지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 되었던 순간이었다.


  번도 자의로 들어가   없을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 케이크를 골랐을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리고  마음이 도무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도,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케이크는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그렇게 무뚝뚝하고 잘 웃지도 않지만, 사실은 누군가에게 감정을 표현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지내왔던. 5년 동안 제주도에 지내면서 봐왔던 할아버지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트럭으로 우리 자매의 등굣길을 책임졌고,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는 나를 보며 말없이 눈물을 훔치기도 하는 분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 이십 대 초반이었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는 간만에 제주도에 내려갔다. 마중을 나온 할아버지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과 말투로 나를 맞았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짜장면을 먹으러 가서도 혼자 재잘거리기 바쁜 나와 할아버지의 짧은 단답들이 오갔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왠지 오랜만의 대면이라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도착했냐는 동생의 물음에 할아버지와도 인사하라고 전화를 넘겨드렸다.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전과는 다르게 입가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계셨다.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 괴리감이 들어서   놀라고,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애정이 잔뜩 묻어나와   놀랐다.  전까지의 전화에서 시크하게 대답하고 끊어버리던 할아버지의 숨겨진 표정이 이랬을 것이라고 돌이켜보니 눈물이  돌았다.


맞아, 할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지.



 이제 할아버지는 제주도보다 더 넓고 푸른 하늘에 살고 계시지만, 당분간은 내 마음속에도 크고 생생하게 자리 잡고 계실 것 같다. 짧고도 길었던 제주에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그렇게 할아버지의 케이크처럼 선물 같은 날들이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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