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 아사코(朝子), 소녀

마주했지만 머물 수 없는

by 이루다
IMG_C138EC0EF957-1.jpeg 베트남 호찌민, 2022 © 이루다



눈 내리지 않는 성탄절

나와 나타샤는 만났다

나타샤의 하얀 얼굴은 밤을 밝혔고

눈 대신 눈이 내게 내려앉아서

나는 눈에 흠뻑 젖었지만

눈이 녹듯이

어느 날 나타샤도 눈을 거두었다


밤이 물러간 아침

나와 아사코는 만났다

아사코의 입술은 아침 햇살보다 따뜻했고

내 뺨은 이미 해가 진 저녁노을처럼 붉어져서

온 마음은 불바다가 되었지만

해가 지면 밤이 되듯이

어느 날 아사코도 저물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

나와 소녀는 만났다

소녀의 어깨는 빗줄기를 감쌌고

어깨를 품은 내 가슴에

비를 머금고 꽃이 피었지만

꽃잎이 떨어진 낯선 꽃처럼

어느 날 소녀는 멀어졌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피천득의 「인연」, 황순원의 「소나기」 속 너는 나의 너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신은 나를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