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술밍아웃

오늘은

by 이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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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의 킴스 패밀리가 한 자리에 모였다.

킴스 셋과 전.송.이.를 모아놓으니 모처럼 집 안이 그득하다.

아부지가 만들어주는 들기름 막국수가 을매나 맛있는지

대전에서 서울에서 소문 듣고 모여 들었다고 했다.

시작은 그랬는데 내친김에 저녁에는 K세프의 마파두부까지 등판했다.

밥이면 밥, 술이면 술 둘 중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나와는 달리

이 분들, 저녁 상 물리자마자 맥주 사러 나갔다.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세계맥주 할인점 냉장고라도 털어온 모양으로

냉동실에서 냉장실에서 맥주가 자꾸 나왔다.

이야기꽃이 피는 동안 나는 달랑 코로나 맥주 하나 앞에 놓고 눈으로 마시고 있었다.


“에이, 엄마가 술 잘 마실 때는 재미있었는데 안 마시니까 재미없네?”


K1이 여친에게 설명을 한다.

그 순간 어쩐지 술 앞에 놓고 제사지내는 술자리 진상이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전에는 재미있었는데....”


음주 경력으로 치자면 K에 비해 십 분의 일도 안 되지만

이래 봬도 소주가 달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샌디에이고에 살 때

코스코에서 사온 쿠어스 맥주 서른여섯 캔이

다음 날 아침에 모두 찌그러진 빈 캔으로 발견 된 쿠어스 증발사건(?)을 비롯하여

건대 앞 양꼬치집, 동대문 곱창집에서의 삼일 정변, 2018년 송년 가족모임으로 시작했던 파티에서 2019년 새벽 와인 아홉 병이 병만 남았다는 전설 등

달콤쌉쌀했던 술과의 추억이 제법 쌓였었다.

자신이 술을 잘 마실 수 있는 체질이라 다행이라던 K의 말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 때는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이야기하며 술잔을 기울일 날들이 얼마든지 많이 남은 줄 알았다.

장이 약해 자주 탈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그런 날이 없을 것 같았다.

성당 앞을 지나갈 때마다 조용히 속삭이듯 바람을 얘기했었다.

뭐 큰 거 바라는 거 없다.

그냥 술 마시고 싶은 날 맥주 한 캔 정도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원래부터 술을 잘 마셨던 건 아니었어.”


K와 연애하던 시절 어느 겨울이었다.

데이트 약속에 늦은 K가 타의에 의한 소개팅을 하고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차라리 거짓말을 하지.)

술맛을 아직 모르던 나는 그 날

성대 앞 주점에서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말소리가 멀어지고 몸이 붕 뜨는 체험을 처음 했다.

당황한 K는 가파르기로 악명 높은 3번지 언덕길을

나를 쌀가마처럼 들쳐 메고 올라가 집에다 무사히 배달을 했다.

내 체중이 적어도 쌀 반 가마보다는 더 나갔고 때는 겨울이었으며

하필 그 무렵 발목까지 오는 롱코트가 유행이었고 부츠까지 신었다는

부연설명이 굳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말로는 술 마실 줄 모르는 애를 이렇게 만들어 왔냐고 하면서도

내심 K의 다부진 체력에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말을 하다 보니 그게 처음인 건 맞는데

술맛도 모르면서 술한테 덤볐던 경험은 또 있었다.


신혼 초,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 K는 거의 날마다 야근을 했다.

야근이 없는 날에는 이런 집합 저런 집합구성원과 회식이나 번개를,

야근이 있는 날에는 끝난 후 수고했다고 소주 한 잔(?)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2년 터울로 아이들이 태어났고

다섯 번의 이사 끝에 수도권에 콧구멍만한 집도 장만했다.

K는 여전히 술 마시는 날이 많았고

때로는 출근하는 날보다 술 약속이 더 많았던 적도 있었다.

어느 날엔가 아이들을 재우고 TV를 보고 있다가

정규 방송이 끝나 결혼식 비디오를 틀어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날마다 먹으면 물리게 마련인데

K는 어떻게 그걸 거의 매일 먹을까?

냉장고에 반쯤 남은 소주가 있었다.

반잔을 따라 맛을 봤다.

온 몸이 부르르, 몸서리가 쳐 질만큼 썼다.

와인은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

집 앞 편의점으로 내려가 작은 병으로 하나를 사왔다.

소주가 그냥 썼다면 와인은 시큼털털하면서 썼다.

와인을 소주잔에 따라 맛을 느끼지 않고 마셨다.

그런데 이상한건 소주 와인 합쳐서 두 잔이나 마셨는데도 정신은 말짱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결혼식은 이미 끝났고 폐백을 하는 중이었다.

또 눈을 깜박이고 나니 비디오 테잎은 다 돌아갔고 음악도 끊겨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샤워를 하고 있었고

잠에서 깼을 때는 아침이었다.

K가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아이들 앉혀놓고 나의 술 역사를 고백하게 됐다.

한 번에 정리를 하고 보니 술을 마실 수 있던 기간이 생각보다 짧고 굵었다.

애들하고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나중에는 어차피 먹을 수 없어서 못 먹게 돼.”


아이들이 와르르 웃는다.

엄마가 돼가지고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부럽다.

그리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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