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한창이겠네.

은둔 일기 (4)

by 이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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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휴대폰 번호이길레 혹시 몰라 받았다.


“여기 00 마을 000 호 인데요.”

“네? 아! 네 네에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전에 살던 집에 이사 온 분이었다.

공교롭게도 요즘 그 동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사를 갔던 다음해 봄

집 근처 화훼센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사과나무 하나, 벚나무 넷

제라늄과 베고니아 미니장미까지 사다가 앞 뒤 화단에 심었다.

그러느라 늘어난 농기구가 호미 삽 모종삽 톱까지 제법 된다.

1층에 사는 특권이 이런 거 아니겠나 하며 마냥 신이 났었다.

조금 늦게 시댁에서 가져온 작약과 패랭이꽃도 심었다.

허나, 농사 뿐 아니라 식물 키우기 자체에 소질이 없다보니

사과나무, 4년 째 키도 몸집도 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벚나무, 첫 해에는 소소하게 꽃이 몇 송이 피었다가

이유를 모른 채 두 그루는 죽었고 그나마 두 그루는 제법 몸집은 커지는 것 같았으나

꽃은 피지 않고 잎부터 났었다.

제라늄 베고니아 미니장미는 그 한 해 꽃을 피운 것으로 소명을 다 했다.

작년에 이사를 나올 무렵에는 자라지 않는 사과나무와 벚나무 두 그루만 남았었다.

그런데 올 봄, 불현 듯 두고 온 작약 생각이 났다.

일조량이 적어 척박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해마다 가랑가랑한 줄기위로 분홍색 꽃 두 송이를 피워냈었다.

그나마 두 번째와 세 번째 봄에는 장기 여행을 하느라 꽃을 보지 못했었다.

올 해도 꽃이 피었을까?

마침 그 생각을 하던 중이었던 터라

뜬금없는 전화를 호들갑스럽게 받고나서야 다소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가스렌지가 잘 안 돼서요.”

“......???”

“써비스센터에 전화를 했더니 빳떼리를 바꾸래서 바꿨는데도 안... 아 근데 여기가 아닌가?”

“네, 저는 전 주인이고요...”

“아! 그러네, 근데 왜 이 번호가 여기 있지? 부동산에 !@#$%^&”


한참을 무슨 말인가를 하더니 인사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새 주인이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느라 잔금 전, 전세계약서를 우리와 작성했는데

그냥 형식적인 거라고 강조하던 그 일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작약은 피었냐고 물어볼 뻔했다.

앞 베란다 화단에 목련이 한창 예쁘겠다고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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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밖으로 보이는 화창한 날씨가

오늘따라 무척 우울하게 느껴졌다.

분리배출 날이었던 어제 내놓지 못한 재활용 쓰레기에 집안이 점령당하는 기분이다.

단추는 산책 나가던 시간만 되면 허리까지 뛰어오르며 안 나가냐고 조르고

조르다 안 되니까 화장실 매트에 쉬 한 번 싸 놓고

또 조르다 안 되니까 장난감 솜 다 빼놓고

그러다 삐쳐서 벽보고 앉아 있다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개들 보면서 으르렁거린다.


“야! 좋겠다? 산책하니까 좋냐?”


하더니

제풀에 지쳐서 잔다.


동생에게서 응원과 걱정과 약간의 놀림이 곁들인 메시지가 왔다.

예전에는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한테

응원이랍시고 말을 자꾸 시키는 게 과연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다.

응원이든 걱정이든 놀림이든

누군가 기억해주고 말 걸어주는 건 매우 큰 위로가 된다.

나는 그렇다.


날이 참 좋다.

길가에도 천변에도 공원에도

지금 밖에는 봄꽃이 한창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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