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에서 라벤더향이 나지 않는다.

오늘은

by 이연숙


멜론을 먹어보기 전에는

메로나가 멜론 맛이려니 했었다.

멜론을 처음 먹었을 때 그 실망스러움이 아직도 기억난다.

선물로 들어왔던 과일 바구니에 멜론이 있었는데

숙성이 덜 되었던 탓인지

달콤하지도 않았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단맛이 덜 든 참외를 먹는 느낌이었는데

값은 참외의 열배 쯤 되는 것이 의아하다고 생각했었다.

외국 여행을 하면서 좋았던 점 중의 하나가

현저하게 저렴한 과일 값이었는데

미국에 살 때 먹었던 멜론은

가격도 착한 것이 달콤한 과즙이 줄줄 넘쳐흘렀다.

메로나 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멜론의 참맛을 알게 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프랑스 여행을 할 때

차창 밖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보랏빛 라벤더 밭을 보면서

집에서 라벤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선천적 식물무지자인데다

베란다도 없는 아파트에

유럽 들판의 쨍한 햇살과 바람이라는 환경을 구현할 수 없으니

생각은 그냥 생각으로 놓아 둘 수밖에 없었다.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근처에 있는 화훼센터에 라벤더가 있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

거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며 친구가 데려간 곳은

파주에 있는 엄청 큰 식물원을 조성해놓고 화분을 파는 곳이었다.

가려고 했던 화훼센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였고

갖가지 다양한 화분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마음이 벅차올라 시종일관 두리번거리며 감탄을 연발하고 있는데

몇 걸음 앞에 보랏빛 꽃이 언뜻언뜻 피어있는 라벤더가 눈에 들어왔다.

화분의 크기며 잎의 모양 꽃의 색상까지 딱 내가 원하던 모양이었다.

앞뒤 보지도 않고 덥석 들어 카트에 실었다.

그리고 돌아서자 맞은편에는

아담한 크기의 커피나무 군단이 싱그러운 빛을 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또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꼭 내가 생각하던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다가가 화분을 들어 올리려다 문득


‘아차! 나 버스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왔지.’


에 생각이 미쳤다.


“이 일을 우짜쓰까 잉, 나 차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하네?”

“그러게, 그 생각을 못했네.”


얇은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 있어 무게가 많이 나가는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작은 모종을 원했던 게 아니다보니

비닐 백에 넣는다고 해도 제대로 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칫 퇴근시간에 맞물리기라도 하면

사람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서 있어야 할 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화분은 무리였다.

눈물을 머금고 남편과 다시 올 날을 기약하며 돌아서 나왔었다.

생각보다 빨리 나흘 만에 K를 앞세우고 그 곳에 다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찜해두었던 그 라벤더가 없다.

라벤더 뿐 아니라 커피나무도 몇 개 남지 않았고

제라늄도 어쩐지 뒤쳐진 것들만 남은 느낌이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지난 주말에 다 나갔다고 했다.

오늘 들어오기는 하겠지만 몇 시 쯤 될지는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 나선 길인데,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는 없어서

개중 꼿꼿한 커피나무 하나와 로즈마리 특대 사이즈를 챙겨 왔다.


20220506라벤더에서 라벤더향이 나지 않는다.jpg


그리고 오늘 다시 양재에 있는 꽃시장에 갔다.

그 곳은 또 다른 구조라 허브코너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긴 통로 두 곳을 지나 또 하나의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허브를 많이 모아놓은 곳이 있었다.

라벤더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곳에는 그나마 내가 알고 있던 것 외의 또 다른 종류가 그득했다.


“향이 가장 많이 나는 건 어떤 종류예요?”

“어떤 향을 찾으시는데요?”

“네? 그냥 보통 우리가 아는 라벤더 향이요, 비누에서도 나고 샴푸에서도 나는.”


말해놓고 보니 어쩐지 무지가 들통 난 것 같은 기분이다.


“얘가 향이 많이 나요. 그 유럽 벌판에 쫙 피어있는 게 이거예요.”


화원주인이 가리킨 것은 나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더 말 해 뭐하겠나, 향도 나고 유럽 벌판이라는데

내가 원하는 조건이 거기 다 들어있었다.

집에 와서 물을 주고 베란다에 내어 놓았다.

로즈마리에 하듯이 라벤더 잎을 살살 흔들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별 느낌이 없다.

냄새 감각이 아직 덜 회복이 됐나싶어

손가락 사이에 잎을 끼워 흔들고는 다시 냄새를 맡아봤다.

여전하다.

그 참 이상하다.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데릭은 메러디스와의 마지막 키스의 순간을

라벤더 향으로 기억했다.

남프랑스에 갔을 때

허브 비누가게가 늘어선 골목에서는 라벤더 향에 취하는 것 같았다.

그 곳에서 사다가 장롱 속에 넣어둔 보라색 비누는

5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향이 난다.

그런데 정작

라벤더에서는 라벤더 향이 나지 않는다.

메로나에서 멜론 향이 나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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