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켜는 것과 못 켜는 것

오늘은

by 이연숙


에어컨이 고장 났다.


네가 켜라 난 괜찮다, 너 더우면 켜든가 난 아직.

K는 밖에 한 번 나갔다 올 때마다 티셔츠가 흠뻑 젖어 들어오고

나는 앉아 있는 의자가 더워질 때마다 옮겨 앉느라

내 방 책상과 거실 식탁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있으면서도

이건 무슨 더위 버티기 오기라도 부리는 것처럼

서로 에어컨 켜기를 미루던 참이었다.

급기야 오늘 오전 실내 온도가 31도를 가리켰다.

방바닥에 누운 채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던 K 땀으로 번질번질한 얼굴로 말했다.


“방마다 온도가 31도래요.”

“아 그럼 에어컨 켜시든가요.”

“난 뭐 아직 견딜만 해요.”

“그...그러시든가요.”


누가 들으면

에어컨 먼저 켜는 사람은 매우 허약한 정신상태를 추긍받거나

혹은 그 달 전기요금 독박을 써야 한다거나, 등

엄청난 패널티라도 있는 줄 알겠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가면서 K가 하는 말


“에이, 그럼 제가 켜드리지요.”


곰인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참 영악하다.

자기 손으로 에어컨은 켜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

아내를 위해서, 라는 상황이 성립되는 거다.


뭐 아무튼, 여기까지는 켜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창문을 모두 닫고 방에서 다시 노트북 들고 거실로 나와 앉았다.

그런데

경쾌한 시작음이 울린 지가 한참 됐는데

어째 실내 공기는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그대로인 것 같다.

와중에 리모컨의 희망온도가 18도인 것을 보고


‘아이고 아이고 도대체가 전기 아까운 줄을 몰라요.’


라고 속으로 혀를 차며 26도로 올렸다.

그러고도 또 몇 분이 지났는데 여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에어컨 표시등에 에러 메시지가 깜박거리더니

가노라는 말도 없이 통풍구가 닫혀버렸다.

이, 이게 무슨...


20220702안 켜는 것과 못 켜는 것.jpg


물건을 곱게 쓰는 편이다.

이제까지 쓰던 물건이 고장이 나서 버린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냉장고며 세탁기 에어컨 TV 등 가전제품은

너무 오래 써서 바꿨거나 누가 쓰던 것을 가져오느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거나

혹은 이전에 쓰던 에어컨의 경우는 세를 놓고 나오면서

다시 들어갈 거라 그냥 두었다가 집이 팔린 경우였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K가 은퇴를 한 이후부터

옷이 필요한 상황도 생겼고 쓰던 가전제품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아침에는 멀쩡하던 김치냉장고 뒤 쪽에 물이 흥건하게 고인 적도 있었고

잘 가지고 다니던 이어폰 충전대기 시간이 갑자기 짧아지기도 했다.

K가 옷장을 정리하면서

이건 미국 있을 때 샀던 거고(최소 10년)

이건 팀장 때니까... (계산도 되지 않음)

이건 아직도 멀쩡해, 어? 그게 그래도 15년이네?

멀쩡하지만 오래 됐고 2~3년간 꺼내보지 않았던 옷들을 모두 정리하고 나니

그득하던 옷장이 휑하다.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치아가 이유 없이 욱신거리기도 하고

잘 걷다가 불현 듯 발목이 아플 때도 있다.

가전제품은 고쳐 쓰면 되지만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는 몸은, 그냥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그사이 실내 온도는 0.5도가 더 올랐다.

주말이라 AS접수도 되지 않는다.

에어컨을 안 켜고 버티는 게 아니라

켜고 싶은데 못 켜는 상황이 되어버린 셈이다.

못 켠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더 더운 느낌이다.

그냥 안 켜고 좀 더 버텨볼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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