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캠핑 주전자를 검색하다가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생긴 납작한 모양의 주전자들 가운데
노랑과 회색무늬가 있는 연노랑색 법랑 주전자를 발견했었다.
그것도 단 돈 만원이라니
망설일 이유가 없어 덥석 클릭을 했고 장바구니에 넣으려고 보니 옵션을 선택하란다.
분명 주전자를 검색했고 주전자 상세보기를 하고 있는데
옵션에는 주전자 12,000원 추가라고 되어있다.
그제서야 눈 부릅뜨고 자세히 읽어보니
만원은 같은 무늬 머그 개당 가격이었다.
어차피 주전자는 사려고 했던 거고 이왕이면 머그까지 같이 해야
감성세트 구성이 완성될 거라 생각하며 홀린 듯 결제까지 마치고 나니 무려 42,000원.
상품이 배송 된 후 K의 한 마디가 쐐기를 박았다.
“그건 대체 어디다 쓰려고 산거야?”
그래도 기죽지 않으려고
“아 뭐, 커피 내려주면 제일 좋아하면서, 캠핑 주전자 가격이 다 그 정도 해. 이왕이면 이쁜게 좋지 뭘. 곧 죽어도 갬성이라잖아.”
라고 받아쳤지만 기분은 영 떨떠름했다.
몇 주가 지나 낯선 개인 번호로 문자가 왔다.
주전자 업체였다.
사진 3장 별점 5점 글자 수 100자 리뷰를 부탁한다고 했다.
그런 기준이 있는 줄은 몰랐다.
집에서 인덕션에도 사용할 수 있고 캠핑 갔을 때에도 나름 잘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제품에 별 불만은 없었지만 좋은 리뷰 형식까지 제시한 부탁까지 받고 보니
어쩐지 떠다 밀리는 기분인 것 같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생각해보면 강요 아닌 것 같은 리뷰강요는 전에도 간간이 경험했던 것 같다.
인터넷이나 가전제품 as 기사가 방문했을 때
어쩐지 부담스러울 만큼 과한 친절의 끝에는
좋은 평점을 부탁하는 멘트를 여운처럼 남기는 게 수순이었다.
포인트를 받기 위해 리뷰를 쓸 때는 종종 있다.
매우 좋지 않더라도 나쁘지만 않으면 그냥 좋다고 쓴다.
리뷰를 쓰면 다른 구매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리뷰를 보고 도움을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이유다.
그래도 분명한 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안 쓰면 안 썼지 좋다고 쓰지는 않는다.
비겁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에어컨이 고장 난 후 주말 이틀은 멘탈이 나갔는지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AS접수를 하고 나서는 열흘을 보낼 일이 막막했다.
첫 날은 짐 싸서 스타벅스에 갔고
K가 학교에 간 날에는 혼자 집에서 버텨 보고
그 다음 날엔 버티다 온 몸에 풀칠을 한 것처럼 끈적거림을 참지 못하고
또 짐 싸서 스타벅스에 갔다.
그리고 오늘은
사흘 버텼으니 이제 6일 남았다고 애써 위로하며 한꺼번에 영화 두 편을 예매했다.
오전에 부지런히 단추 예방접종하러 다녀오고
물병에 카디건 챙겨 영화관으로 피서를 나섰다.
첫 번 째 영화는 이 전에 한 번 봤던 건데
광고시간 10분을 감안해 상영관에 들어갔더니 이미 영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게 어디에도 써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영화관은 광고시간 없이 정시에 시작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여 오늘 영화 도입부부터 보고 있자니 중요한 부분을 꽤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직 중반부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왓치에 진동이 울린다.
확인도 하지 않고 다시 영화에 집중, 두 번째 진동이 울린다.
이 시간에 내게 올 중요한 전화가 있을 리 없어 또 무시했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 세 번째 진동이 격하게 손목을 자극한다.
얼핏 번호 뒷자리를 보니 에어컨 AS번호 뒷자리와 같다.
허리를 숙여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한 시 반쯤 방문해도 되겠냐고 했다.
예약취소건이 생긴 모양이었다.
시간을 보니 약 한 시간쯤 남았다.
지금 가면 AS는 받을 수 있겠지만
이미 예약해 놓은 두 번째 영화와 지금 보는 영화 모두 포기해야한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한 시 반 약속을 하고 가방을 챙겨 나와 집으로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0분 정도였다. 평소 차를 갈아타거나 걸어가서 차를 타는 과정이라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영세한 중소기업도 아니고 이 나라 굴지의 대기업 제품 AS 접수절차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접수가 되고도 이 찜통 같은 날씨에 무려 열흘을 기다려야 수리든 뭐든 할 수 있다는 상황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산처럼 많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수리가 돼서 집에서 빈둥거릴 수만 있게 된다면 그걸로 됐다.
약속한 시간에서 15분 정도 늦게 기사님이 도착했다.
짜증이 나기는 커녕 혹여 취소했던 집에서 다시 호출을 한 게 아니라서 마음이 놓였다.
부품을 갈고 가스도 충전해야 한다며 수리비가 9만원이라고 한다.
90만원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리비를 결제하고 나서
결제는 됐는데 도무지 영수증을 프린트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단말기를 붙잡고 씨름하는 기사님을
멀뚱하니 서서 마냥 기다렸다.
수리한 에어컨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 때문인지 마음까지 관대해지는 기분이다.
출입문을 닫는 순간까지 평점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 순간 만큼은 사진 10장 별점 10점 글자 수 500자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평점에 대해 나름 정의롭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아니었다.
무척 좋은 품질의 서비스였다거나 매너가 킹스맨 수준이었다거나
그런거 다 필요없다.
만두 찜통같은 집에서 일주일을 더 살 뻔했다가 구조된 것이 고마울 뿐이다.
혹시라도 평가 설문 전화가 왔을 때 지금 이 마음이 유지 될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