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책은 그만 사야지

by 이연숙
IMG_1244_책.jpg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이지는

마음이 심란할 때면 머핀을 굽는다.

연인이 죽었을 때

그녀는 주방 한 가득 머핀을 구워놓고는


"머핀은 충분해, 이제 머핀은 그만 구워야지."


라고 말하며 다시 밀가루를 계량한다.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나도 마음이 심란할 때면 책을 샀다.

그렇게 쌓인 책이 3천권이 넘었을 때

얼추 돈으로 계산해보니

권당 만원으로만 쳐도 삼천만원이었다.

그 중에는 읽은 책보다 아직 열어보지 않은 책이 더 많았다.

K씨 은퇴한 후

할 일도 없고 책 살 돈도 없을 때를 대비한 거라고 옹색한 변명거리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근거없는 소망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방 하나에 천정과 바닥을 뺀 나머지 면적을 온통 책으로 채우고 싶었다.

조금 더 나아가 이중으로 미닫이 책장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지난 번 살던 집을 수리하면서 그 소망의 일부를 완성했었다.

테라스 확장을 해서 4미터쯤 되는 거실 양면에

채넬식 책장을 설치해서 책을 가득 채웠다.

시판용 책장의 책을 꽂았을 때 앞 뒤 위 아래 공백이 아까워

책높이보다 겨우 2~3센티 여유를 두고 촘촘하게 꽂은 모양이

거의 책 벽에 가까웠다.

채넬 기둥이 가늘어서 책을 꽂는 용도로 사용하면 안된다는 말을 판매처로부터 들은 터라

저러다 어느 날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 해 여름, 에어컨을 켜놓고 거실에서 딸아이와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자는 동안 책꽂이가 무너지면 어떡하냐는 아이의 말에

책에 깔려 죽는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했더니


"아! 이 엄마가 진짜~"


라며 아이가 뽀얗게 눈을 흘겼다.


이사를 할 때 견적을 보러 온 사람이

책 짐 때문에 용달을 하나 더 불러야 한다느니

사람이 더 필요하다느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느니 하며 비용 추가를 요구했다.

그러지 않았어도 공간이 줄어

그 집같은 환경을 다시 만들 수 없어 책을 줄이기로 마음 먹었다.

책장 정리만 일주일이 넘게 하는 동안

더러는 중고 책방에 팔고

더러는 중고거래 사이트에 내어 놓았으며

일부는 분리 배출 하는 날 종이 쓰레기로 버렸다.

정리 기준은

이미 읽었거나

너무 오래 됐거나

출처를 모르거나

영원히 읽게 되지 않을 것 같은 책으로 분류했다.

그렇다고 딱 떨어지게 마음정리가 되지는 않았다.

읽었지만 언젠가 다시 보고 싶은

오래 됐기 때문에 간직하고 싶은

지금은 읽게 될 것 같지 않지만 언젠가 문득 찾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이유로, 빼 놓았던 책이 다시 쌓이기 일쑤였다.

수그리고 일하느라 목도 아프고

허리가 뻐근했지만

그러느라 일에 진척이 있을리 없다.


중고 책방을 드나들면서 열심히 책을 팔던 K씨가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냐? 적어도 반값은 쳐줘야지 십분의 일이네. 세상에..."


라며 씩씩거렸다.

책을 사들인 장본인이니 나는 뭐라 말도 못하고 풀이 죽었다.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나도 이지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책은 그만 사야지."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그랬었다고 말했더니


"즈이 아버지도 그러더니 어떻게 그런것도 닮냐?"


고 말했다.


" 아버지가?"

" 그래, 늬 아버지도 이다음에 집을 사면 꼭 방 하나는 책만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고 노래를 했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 말에 힘을 받은 건 아니지만

머리로는


"이제 책은 그만하면 됐어."


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손가락은

습관처럼 책 주문을 하고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사람 만큼의 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