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남자가 나랑 결혼해주었다

오늘은

by 이연숙



친구와 카페에서 사주를 본 적이 있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중 아직 잊히지 않는 말이 하나 있다.

나와 K의 사주를 보고는 내 얼굴 한 번 쳐다보고 종이에 적은 생년월일 숫자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 전에 궁합 안 봤어요?”

“글쎄요?”

“안 봤겠지, 남자 쪽에서 봤으면 절대 결혼 안 시켰을 사주야.”


재미로 보자고 했지만 기분은 영 떨떠름했었다.


K는 어렸을 때 성당 근처에 살면서 성당 일을 도우며

성당 마당을 놀이터 삼아 놀면서 컸다고 했다.

사주를 같이 봤던 친구도 엄연히 가톨릭 세례명이 있음에도

딸들 입시 시기가 되면 절에도 가고 철학관에도 갔던 것처럼

어머니 역시 우리가 이사를 할 때마다 요강과 밥솥을 먼저 들일 것을 재차 강조하셨고

그런 후에 어머니는 성수 통을 가지고 오셔서 집 안 구석구석에 뿌리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예수님과 성주신이 만났을 때 어떤 인사를 했을지 궁금함과 동시에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있어서는

미신이고 신앙이고를 가리지 않는 엄니 마음에 뭉클했다.

그런 엄니가, 같은 마음으로 궁합을 보셨을까?

안 보셨는지 보고도 모른 체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30년 전에 30대였던 K를 지금의 30대 남편, 아빠들과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

TV리얼 예능 프로그램에서

육아와 조리 집안일을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장면을 볼 때

슬쩍 눈을 흘긴 적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남자는 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전부였고

그 어려운 걸 하는 남자가 집에 들어와서 까지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게 하는 것을

어른들은 용납하지 않았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왜 아이들이 엄마하고만 소통이 되고 아빠는 겉도는지

K가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을 털어 놓을 때에도

뭐가 잘 못 된 건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때까지 K가 정석대로 열심히 사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면

직장을 은퇴한 지금 K는 바람직한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

'바람직한 남자는 나랑 결혼해주지 않으니까.'

영화를 보다가 담담한 표정으로 서래가 말할 때 괜히 슬쩍 K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사람들 각각 바람직하다고 느끼는 방향이 다를 수 있겠지만

K의 경우 노력해서 변화한다는 점이다.

작년 가을 블로그에 글을 적었을 때보다

그 새 K는 또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2021. 10. 19. 네이버 블로그


에미는 좋것다.


K의 가을은 늘 바쁘다.

내내 휑하던 탁상 달력이 10월에는 그득하게 찼다.

그 중, 지인의 밭에서 하는 고구마 수확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지난 일요일에

K는 밀짚모자를 쓰고 등산 신발을 신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구마가 좋은 건지, 농사가 좋은 건지,

그냥 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은 건지

여하튼 K의 발걸음은 근래 보기 드물게 경쾌했다.

(사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이유는 3 번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안 하던 주 오일 풀타임 실습을 하는 중이라

저녁이면 숟가락 들기도 버거워 보이던 그가 고구마 수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얼굴이 다 해쓱해진 것 같았다.

와중에도, 비가 오는 중에 캐느라 고구마가 온통 흙덩어리라며

방 안에 신문을 깔고 일일이 펼쳐 놓았다.

고구마 표면이 꾸덕꾸덕 해질 무렵

본가에 가져다 드린다며 세 박스 하고도 대형 쇼핑백으로 또 하나를 담았다.

한 때 시엄니도 엄청난 규모로 고구마를 심었었다.

집 앞 밭은 물론이고

택지로 다져놓고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를 일궈서 두 이랑

노인정 친구네 노는 밭에 또 한 이랑

어디든 터만 있으면 고구마를 심었다.

가을이면 문간 방 하나가 노란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고구마로 천장까지 찼었다.

밤고구마이면서도 그리 퍽퍽하지 않고 달기까지 해서

나도 엄니 고구마는 잘 먹었다.

그 무렵에는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집에 갈 때마다 엄니는


- 고구마 가져갈래?


가 인사였다.

공터에 집이 들어서고

노인정에 나가지 않게 되고

무엇보다 엄니 건강이 나빠지면서 고구마 농사도 끝이 났다.

이제는 역으로,

비록 남의 집 농사지만 고구마를 엄니에게 가져다 드리게 됐다.

마음 같아서는 캔 날 바로 실어가고 싶었지만

어지간히 힘이 들었는지 한 주 지나 K혼자 다녀오꾸마 했다.

엄니가 차려주는 점심도 먹고

낮잠도 한 숨 길게 자고 난 후

길이 많이 밀린다며 두 시간이 넘게 걸려 K가 집에 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졌다.

마트에서 고구마를 샀더니 하나도 맛이 없더라고 했다.

집에 가져가서 마탕 연습이나 해야겠다고 했더니

네가 요리를 다 하느냐고 하셨단다.

요즘 열심히 배우러 다니고 있다고 했더니

엄니는 말씀하셨단다.


- 에미는 좋것다.


그 말을 할 때 엄니 표정이 안 봤어도 보이는 것 같았다.

거실 주방의 경계가 없는 엄니 집 안에서도

엄니는 주방 근처에 남자들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었다.

덕분에 이 집 남성동지들은 (아부지 아들 둘, 손자 셋까지)

무려 만두가 주식이다시피 하는 집에서 자랐으면서

만두를 빚어본 적이 없다.

송편은 말할 것도 없고

명절이면 두 말씩 담가 부치는 녹두 빈대떡을

먹을 줄만 알았지 부쳐본 적은 없다.


- 그게 말이지, 엄밀하게 말하면 나 좋자고 그런게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좋은 거지.

- ??

- 아내가 먼저 죽으면 실제로 굶어 죽는 남자들도 있대.

- 배달 시켜 먹으면 되지?

- 배달을 어떻게 시키는지 몰라서 죽는 남자도 있을걸? 배달시키라고 시키기만 했지 직접 하지는 않잖아.

- ......

- 그러니까, 가는 데 순서 없는 세상에 자기 먹고 싶은 건 자기가 만들 줄 아는 게 좋잖아 안 그래?


(어쩐지 내가 너무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아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혹시라도 엄니가 내게 말씀하시면 이렇게 말해야겠다.


- 네 어머니~ 지인~짜 좋아요. 진즉 하라고 할 걸 그랬어요. 호호


20220821바람직한 남자.jpg


생각해보니 그거 참 고마운 일이다.

사주가 상극이라는데

그 바람직한 남자가 나랑 결혼해 주었으니.

그 남자가 어제는 몸살이 났다.

온몸이 아프다며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릴 거라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K에게 빈둥거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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