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3일차
그럴 필요는 없지만 굳이 따져보니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홈쇼핑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어떤 집 아이는 아빠보다 택배기사를 더 자주 본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이미 지은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던 아파트는
계단식도 복도식도 아닌 애매한 형태였다.
한 층에 네 가구가 있었는데 중앙 승강기에서 내리면
양쪽으로 각각 4미터 가량의 짧은 복도가 있고
복도 끝집은 마주보이는 구조로 즉, 디귿자 복합형이었다.
반드시 단말기에 수령자의 사인을 받아가야 한다는 우체국 택배부터
그 당시에 택배는 직접 고객의 집까지 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몇 개 회사가 통합하여 현재 거물급이 된 C택배는 그 때도 매우 바빴던 모양이다.
친절한 미소까지 머금고 때로는 간단한 안부까지 묻는 기사가 있는 반면
C사 기사님은 이미 그 때부터 문전 택배를 시전했다.
초인종 소리가 나서 나가보면 택배 박스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사람은 이미 승강기를 타고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 기사님이 엄청 키가 크고 잘생겨서 꼭 한 번 얼굴을 보고 싶다거나
말을 한 번 건네 보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어쩐지 휭하니 던져놓은 것 같은 택배상자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러던 중, 어떤 경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생선을 주문했었다.
벨소리에 후다닥 나가 문을 여니 스티로폼 상자가 마치 내 팽개쳐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그것도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스티로폼 박스의 모서리는 성한 곳이 없이 부서졌고
봉합한 테이프 끝 부분도 너덜너덜했고 내용물은 한 쪽으로 쏠려있었다.
세상에, 먹을거리가 담긴 택배를, 그것도 신선식품이 담긴 상자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다니.
화가 나서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애꿎은 상담원은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 했고
담당 대리점에 전달하겠다고만 했다.
그래서 시정이 됐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곳에 사는 동안은 그 기사가 지역 담당일 테고
그 택배사를 이용하는 건 판매자 몫이지 내 선택이 아니니 그랬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을 때에는 기사가 아니라 배송 시간이 문제가 되었다.
역시나 C사 였는데 그 택배가 우리 아파트 단지에 오는 시각은 늘 밤 열시에서 열두시 사이였다.
물건을 늦게 받는 건 그렇다 치고 그 시간까지 일을 하는 기사는 대체 잠은 언제 자나 싶었다.
불편했지만 그 시간에 일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굳이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택배로 주문하는 물건들을 족족 K가 먼저 확인을 하게 된다는 데 있었다.
가끔 한 번씩은 ‘그런 건 뭐 하러 샀어?’ 하는 눈빛을 느낀 적도 있었다.
뭐 꼭 몰래 사려고 했다거나 사지 말아야할 물건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걸 일일이 검사 받듯 하는 느낌이 불편하기는 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었다.
(이 상황도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친절한 상담사는 공감능력도 뛰어났다.
“네 불편하셨겠어요 고객님, 때로는 가족이라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물건도 있을 텐데 너무 늦게 배달이 되니 그럴 수 없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그 순간 꽁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게 뭐 대수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친절한 상담사 한 분이 나를 성장하게 했다
고 생각했는데 그 때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 며칠 전에 있었다.
“저기, 실은 고백할 게 있는데.”
일요일 오전, 동네 새로 생긴 쌀국수집을 시찰(?)하고 내친김에 카페에서 커피까지 마시는 중이었다.
K가 궁금하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내가, 뭘 하나 샀는데 그게 직구로 오는 거라 배송 날짜가 아직도 추적이 안 되네?”
“그게 뭔데?”
“어 그러니까 그게, 캠핑용 드리펀데 !@#$%^&*^%@$”
캠핑용 드립세트라면 이미 있던 것을 헐값에 팔아넘긴 전적이 있는 터라
말이 자꾸 길어졌고 말이 길어질수록 계속 엉켰다.
나도 내가 뭔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뭐야, 몰래 가져가려고 샀는데 가기 전에 안 와서 어쩔 수 없이 얘기하는 거라는 말이지?”
라고 말하는 K의 표정이 득의양양했다.
결국 그 물건은 어제 밤에 집에 도착했고 나는 그 전날 제주도에 왔다.
어제 K가 보내준 사진을 보니 어차피 부피가 커서 가져올 수도 없었을 것 같다.
‘하루만 일찍 왔으면 좋았잖아. 그랬으면 못 가져오더라도 숨겨 놓고라도 왔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비행기는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