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숙 Jul 22. 2023

저는 주방에서 은퇴했어요.

오늘은


우울감이란 것이 올 때도 있고 그러다 가기도 했다.

때로는 저절로 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한 가지 일에 열중하거나 환경을 바꿔보거나 

친구를 만나 폭풍 수다를 떨거나 등 뭔가를 해야만 떨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번에는 그 기간이 조금, 많이 오래간다 싶었다.

벌써 몇 달 째 내려앉은 기분이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해야 할 일정이 있는 날이면 귀찮고

누구를 만나기도 싫고, 여행이 설레지도 않으며, 글 쓰는 게 즐겁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달걀 두부 감자 양파 대파 애호박 등 최소한의 식재료는 구비해두고

김치찌개 된장찌개 고추장찌개를 돌려막기 하던 것조차 언제였는지 

냉장고가 텅 빈지 이미 오래다.

밀키트로 배달음식으로 외식으로 겨우 저녁식사 당번 소임(?)을 다 하는 동안

보다 못한 K가 김치를 담그고 밑반찬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상태가 육 개월쯤 지속되고 있을 때 문득, 

뭣보다 내가 스스로 그 것을 떨쳐내려는 노력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쩔 수 없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러그러한 상태를 이야기하니 전형적인 우울증이며 그 지수가 매우 높다고 했다.

그런들 내 마음인데 누가 뭘 어쩔 수 있겠나 하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의사를 만났다. 

3개월 쯤 지났을 때, 

같이 산책길에 나서준 K덕분으로 말문이 조금씩 트였다.

여름에 몰려있는 가족 생일 주간을 지나는 동안에는

아이들 덕분에 맛있는 것도 먹고 공주 액세서리를 하고 성수동 거리를 활보하며 아이처럼 소리내서 웃기도 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글을 쓸 때 기분 좋았던 느낌이 조금씩 살아났다.




줌으로 하는 원어민 영어 회화시간이었다.

미국인 강사가 내게 최근에 어떤 요리를 했었냐고 물었다.

(왜 하필 요리람?)

최근에 요리를 한 적이 없어 당황하기는 했지만

다른 두 멤버에게 물었던, 최근에 본 공연이나 만났던 사람을 물었어도 달리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저는 주방에서 은퇴했어요.”


라고 말했다.

강사와 참가자 모두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한 바탕 웃었다.

그럼 식사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밀키트도 이용하고 배달음식을 먹을 때도 있고 남편이 요리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을 해서 순천에 살고 있다는 강사는

좋겠다며, 자기는 장모님이 못하게 해서 요리를 비롯한 집안일을 전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아쉽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째 장모님이 한국인 어머니인 것을 즐기는 것 같은 건 기분이 드는 건 왜 인지.



어제도 K는 깍두기를 담갔다. 

지난번에 담갔던 열무김치를 하루 지나 냉장고에 넣었더니 너무 시어서 내가 먹지 않으니까 어떻게 자기가 담근 것을 젓가락도 안 대냐고 서운한 기색을 보였었다.

깍두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 

여름 무는 맛이 없어서 이러쿵저러쿵 하기에 못하겠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어제 홀연히 시장에 가서 무 두 개를 사다가 그 즉시 절이고 버무려 담그고는 아예 익히지도 않고 냉장고에 넣어버렸다. 

설거지까지 해치우고 곤하게 낮잠을 자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주방 복귀를 해야 하나?’

잠깐 스친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 몰라, 그냥 되는대로 먹고 사는 거지 뭐. 

요리, 하고 싶을 때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사 먹으면 되지.‘

결론이 나지 않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끼니때는 돌아온다. 

아무래도, 실질적인 주방 은퇴는

이 세상을 떠날 때에나 가능하려나 보다. 




작가의 이전글 자주 만났으니 친구가 되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