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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Sep 18. 2023

모든 이사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첫 번 째 이사는 K의 출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두 번 째는 첫 아이를 낳은 후 시댁 가까운 동네로

세 번 째는 다시 회사 가까운 동네로, 네 번 째는, 다섯 번 째는...

여섯 번 째 이사는 내 집을 마련해서였다. 

집에 물이 찬다거나 집주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거나 등 이사를 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집을 사서 이사를 한 이 후에도 이런 저런 계기가 생겨 열한 번 집을 옮겼다.

모든 이사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원하지 않아도 사는 곳을 옮겨야 하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이쯤 되면 이사하느라 들인 비용만 모아도 빌딩하나 지었겠다는 시어머니 말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행의 맛을 알게 된 건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에는 일 년에 한 번 회사 연성장 기회가 왔을 때 

회사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커다란 배낭에 유모차까지 엮어서 아이들 업고 걸리며 나서던 것이 굳이 말하자면 여행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성장도 진화해서 관광지에 있는 리조트로 바뀌었을 때에도

숙소의 질이 좋아졌을 뿐, 

우리에게 여행이란, 가고 싶은 장소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숙소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때로는 입실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배회하거나, 늦게 도착해서 위치가 좋지 않은 방을 배정 받는 일도 그러려니 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여행은 그런 건줄 알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게 먼저였을까? 아이들이 더 이상 부모와 여행을 다니지 않은 게 먼저였을까? 아니면 주말 골프에다 이런저런 그룹들과 이어지는 모임으로 바쁜 K의 상황이 먼저였을까? 어쩌면 모든 게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닥쳤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배우면서 촬영여행을 가면서 때로는 일출을 찍는다며 1박을 하기도 했고

마음 맞는 멤버와 셋이 비행기타고 제주도에도 갔다.

이제까지 몰랐던, 이후로도 모르고 지났을 수도 있었던 

아름답고 낯선 곳에 가는 것이 설렘으로 짜릿했다.

어느 해엔가는 유럽을 네 번이나 가게 됐는데 

매 번, 가서는 힘들지만 돌아오면 또 다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보다, 했다.


2020년, 미국여행을 계획했었다.

항공권 예약을 하기 직전 어느 지역에서 확진자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어쩔 수 없이 포기했고 그 때 미뤄두었던 여행을 올 해 9월에 목적지를 유럽으로 바꿔 다시 계획해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3년 전 그 때처럼 설레지도, 긴장되지도, 기대감에 들뜨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다가올수록 귀찮고 어딘가 아플 것 같고 돈도 아까운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결국 예약했던 항공권을 취소했다.

나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네, 했다.

문득, 오래 전에 철학관에서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만해도 ‘내가 무슨.’ 하며 귀담아 듣지 않았었다.

아마도 그 말이 무척 부정적인 의미로 들렸던 것 같다.

이 전에 살았던 집을 집값의 5분의 1정도의 큰 비용을 들여 인테리어를 해 놓고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겨울에 해가 들지 않아 춥다며 이사를 해야겠다고 하자

아이가 말했었다.

역마살이 있어서 그런가보다고.

속으로는 발끈했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곰곰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3년 차 살고 있는 이 집이 다 좋은데 교통이 불편해서 어디를 가려고 해도 최소 한 시간은 더 걸린다며 푸념을 시작하자 K가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나도 안다.

지금 시점에서 다시 이사를 꿈꾼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쯤.

여행이 설레지 않게 된 것도

더 이상 네이버 부동산을 검색하지 않게 된 것도

이제는 내 안에 있는 역마살의 기운도 힘이 빠져가는 게 아닐까 싶다.



며칠 전, 유럽대신 혼자서 제주도에 왔다.

예전에 가성비고 뭐고 무조건 저렴한 숙소를 찾았다면

이번에는 될수록 방에 머물면서 바깥 구경을 해도 좋을, 풍경 좋은 방으로 예약을 했다. 

오래된 호텔을 최근 리모델링한 곳으로 외관은 깔끔하지만 내부는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 짐을 풀었다.

작은 책상, 의자, 목재 옷걸이와 작은 냉장고 등 내게 필요한 건 다 있다.

예약한 날이 다가올 때까지 매일 취소할까? 그냥 갈까? 를 되풀이 했다.

나서기는 힘들었는데 떠나니 좋다.

어쩌면 나는 이사를,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냥, 떠나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걸 사람들은 역.마.살. 이라고 부르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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