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이 다음에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저녁 무렵 하루를 정리할 때
창밖을 내다보며 맥주 한 캔 정도 할 수 있는 흰머리 할머니가 되는 거, 그거 하나였다.
많이도 아니다.
여행을 할 때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컵라면에 맥주 한 캔, 딱 그거면 충분하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맥주 금지령을 받았다.
다른 건 됐고 그냥 맥주 하나면 됐는데
무정한 의사는 정 술을 마셔야겠으면 맥주 말고 차라리 위스키나 소주를 마시라고 했다.
뭐 하긴, 내가 맥주를 마시든 소주를 마시든 의사 좋은 일이 아니라 내 건강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소주 삼분의 일잔에 맥주를 말아 숟가락으로 탁 쳐서 돌리는 맛깔스러운 장면에서 나는 혼자 쓸쓸하게 소주를 마신다.
사실 그마저도 근래 들어서는 가뭄에 콩 나듯 매우 드문 일이기는 하다.
월드컵부터 시작해서 평가전 아시안 게임 등등 축구에서 축구로 이어지는 일정을 무슨 근거인지는 몰라도 치킨과 함께 했다. 치킨에 쓴 돈 만큼이나 K의 뱃살도 점점 늘어났다.
한 손에 치킨을 들고 다른 손으로 맥주 캔을 야무지게 따는 K옆에서 나는 탄산수를 마셨다.
치킨에 함께 포장되어 온 콜라가 몇 달 동안 냉장고에 쌓여 며칠 전에 당근에 팔았다.
그걸 사는 사람이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신사였던 것도 의외였고
맥주 마실 수 없는 사람 옆에서 세상 맛있게 맥주를 마시는 K도 얄미웠다.
어째서 내 위장은 고만큼의 즐거움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걸까.
3주 전에 했던 건강검진 결과 통보서가 왔다.
체중은 약간 줄었고 시력은 작년 보다 떨어졌다.
우울증이 의심이 되고 기타, 다른 수치는 작년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열 장에 달하는 결과표를 넘기는 동안 첫 장부터 계속 거슬리는 단어가 있다.
‘위험 음주’, ‘절주 필요’, 위험 음주(폭음), 금주 처방전 (유) 등등
음주와 관련한, 그것도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고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음주와 관련한 부분은 백퍼센트 문진표에 근거하고 있었다.
문진표에는 술 종류에 따른 양을 체크하게 되어있었는데
소주 3잔, 맥주(500ml) 1캔, 와인 2잔, 막걸리 1병, 위스키 0
으로 표시했었다.
검진 날 센터 직원이 그걸 보고 이걸 한 번에 다 마시는 거냐고 물었다.
순간,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몰라 이 사람이 바본가 내가 바본가 싶었다.
“아니 그게 소주를 마실 경우는 석 잔이고 맥주의 경우는 한 캔이라는 말인데요.”
라고 했고 직원이 웃으면서 그렇게 고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저녁에 들어온 K가 통보서를 읽다가 빵 터졌다.
“위험 음주상태래 킬킬.”
“.......”
“절주 하고 육류는 살코기 위주로 먹고 닭이나 오리는 껍질을 벗기고 먹으래.
아이스크림 과자 케이크 먹지 말고 국 찌개는 국물보다 건더기 위주로, 젓갈 장아찌도 안되고
아 그리고 장어 먹지 말라네? 난 그런 말 없었는데.“
“!@#$%^&*”
K가 아주 신이 났다.
식습관에 대한 주의 혹은 지적은 언제나 이미 오래전부터 당뇨를 안고 살고 있는 K의 몫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K는 자신의 식습관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이제 보니 듣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말들이 싫었던가 보았다.
정리하자면, 경계선 상에 있는 부분들은 있지만 내 건강은 아직 괜.찮.다. 라고 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다.
위험음주자라니, 거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