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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Dec 31. 2023

봄이 되면 새 잎이 나겠지?


상담 선생님이, 행복했던 일, 기분 좋았던 순간 등을 자주 떠올려 보라고 했다.

그 순간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 후로는 줄곧 즐거웠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려는 것이 의무처럼 느껴졌다.


얼마전에 청소를 하느라 화분을 물도 줄겸 테라스로 내 놓았다.

추워진 이후로 창문을 자주 열지 않아서 내 놓은 김에 바람도 쏘이라고 

반나절 그대로 두었다가 저녁 무렵 집 안으로 들여 놓았다.

다음 날 아침, 어찌된 일인지 커피나무잎 색이 평소보다 진하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안경을 쓰고 자세히 보니 정말로 이파리들이 대부분 색이 변해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줄기를 조심스레 흔들어봤는데 잎이 떨어지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잎들은 속절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검게 변한 이파리들은 끝쪽부터 차츰 마르다가 가지에 붙어있는 부분이 맥없이 툭 떨어져버렸다.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내게도 기쁜과 설렘을 주었던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작년에 샀던 커피나무가 제주도에서 한달 사는 동안 말라 죽었다.

그 때 K에게 말했었다. 내가 혹여 내년 봄에 다시 화분을 산다고 하거든 손목 발목 묶어서라도 제발 사지 못하게 말려달라고.

하지만 그가 손목 발목을 묶을 겨를도 없이 지난 봄 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파주 화훼단지에 들러 기어이 커피나무를 사 가지고 왔었다. 

라벤더 탱자나무 로즈마리 등 향긋한 초록의 식물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말로 커피나무 딱 하나만 사가지고 행여 마음 변할새라 도망치듯 그 곳을 떠났었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화분을 사면 그 곳에서 아예 분갈이까지 해서 가지고 올 수 있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새 커피나무는 작년 것보다 키는 더 큰데 이파리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직원 말로는 그 곳에 통풍이 잘 안돼서 그런 거라며 바람 좀 쏘여주고 물 잘 주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허나 내가 누군가. 멀쩡하던 화분도 우리집에서 몇 달 지나면 생기를 잃어가다가 죽이는데 이골이 난, 대표 식알못 아닌가. 

인터넷으로 토분을 주문하고 집에 있던 흙으로 분갈이를 해주고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볕 잘드는 창가에 두고 물 주면서 창문도 자주 열어주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

초여름 쯤이었나? 뭔가 희끗한 것이 보여 안경을 쓰고 자세히 보니 꽃이었다.

세상에, 꽃이 피었네! 라며 호들갑을 떨며 K를 불렀다.


“어? 근데 하나가 아니네?”


안경을 고쳐쓰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로 여러 줄기에서 하얀 꽃이 피거나 피려고 준비하고 있는게 보였다. 전에 키우던 커피나무에서는 꽃 한송이가 겨우겨우 피었다가 금세 져버렸던 적이 있다. 어차피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키우기 어려울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 그 꽃도 기적처럼 여겨졌었다. 그런데 이 번에는 그 때에 비하면 꽃잔치 수준이었다.

그 기쁜 사실을 가족단톡방에 널리 알렸다.

누군가 불쑥 말했다.


“수정을 해줘야 열매도 맺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물감 붓으로 꽃마다 옮겨 칠해보았다.

그 때 기분이 설렘과 기대로 벅찼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기대가 없었던 것에 비해 살 때 마른 나뭇잎들은 다 떨어지고 연초록의 새 잎들이 날마다 새로 나왔다. 

여리고 윤기나는 그 잎들을 볼 때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리고 가을 쯤이었을까?

물을 주고 안으로 들여 놓고 나면 안경을 쓰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었는데

어느 날엔가 한 줄기 중간에 초록색 동그란 것이 달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고는


“이게 뭘까~요?”


했더니 아이들 모두 동시에 


“열매네.”


한다. 그 무렵 바리스타 과정 수업을 듣고 있던 K는 강사에게 사진을 보여줬다고 했고

강사가 커피열매라고 확인해 주었다고 했다.


“오마이갓! 열매라니..”


안경 고쳐쓰고 가지 사이사이 잎을 들춰보니 아까 그 것 말고 같은 줄기에 두 개가 더 있었다.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한동안 커피나무를 들여다보는 것이 일과가 됐었다.



이렇게 나뭇잎이 많았었나 싶을만큼 마른 이파리들은 날마다 무수하게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열매는 붉어지지도 않은 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는 잎을 보는 마음이 씁쓸하다 못해 아리다.

결국 이 나무도 여기까지인가?

트리장식을 달려고 의자에 올랐다가 나무 윗부분이 보였는데 거기에는 여린 새순이 있었다. 

절망스러웠던 마음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슬며시 옮겨 앉는다.

‘어쩌면, 봄이 되면 새 잎이 나올지도 몰라.’

생각해보니 내가 식물을 죽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동생네서 가져온 군자란이 제 때 물 잘주고 보살핀 보람도 없이 느리게 한 잎씩 죽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과감하게 화분을 뒤집어 죽은 뿌리를 솎아주고 다시 심어 영양제를 꽂아 놓았더니 한참 후에 뾰족하게 (그러나 겁나 천천히) 새 순이 올라오기 시작했었다.

원래 있던 포기가 모두 죽기까지는 이 년이 걸렸고 새로 올라오기 시작한 새 순이 자리를 잡기까지도 거의 일 년이 걸렸다.


마음과 몸이 힘들었던 해가 지나가고 있다.

지난 여름 폭염을 두고 어느 기상전문가는 ‘아마도 올 여름이 가장 시원했던 여름’이 될지도 모른다. 고 했듯, 어쩌면 나 역시 올해의 몸과 마음이 가장 가벼웠던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힘든 것보다 더 나빴던 건, 나아지려는 노력을 할 마음이 먹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다행인건 상실감과 무력감에 찌든 내 곁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늦게나마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봄이 되면 커피나무에 새 잎이 나겠지.

어쩌면 군자란 꽃이 필지도 몰라.

육십 해를 한바퀴 돌았으니 다음 해는 다시 태어나는 거라면 좋겠네.





지나다 들렀거나 자주 오시거나 

혹여, 호옥시라도 제 글을 기다려주셨던 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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