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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Jan 02. 2024

내가 알던 내가 아니네


나는 내가 춤을 잘 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돌아가신 큰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전축을 틀어놓고 큰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예뻐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수줍음을 많이 타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면 주눅이 들어서 남들 앞에 서는 것조차 어렵지만 그래도 음악이 나오면 어깨가 들썩거려질 때가 있다.

중학교 때 서예반친구들 중 네 명이 친하게 지냈다. 공부를 잘하고 고지식하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했으나 그 중에도 전교 1등이 있었던 반면 내 등수는 전교에서 세기에는 좀 오래 걸렸다. 친구들은 공부와 서예 밖에 몰랐던데 비해 나는 그 무렵 재미있고 멋진 남자가수를 좋아했고 그의 노래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기도 했다, 일하는 엄마 대신 집안 일을 하느라 만들 줄 아는 음식도 제법 많았고 미술 선생님을 좋아하는 바람에 그림이나 조각에도 소질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세 명의 이 아이들은 내가 자기들보다 재능이 많다고 굳게 믿었다.  

어느 주말에 우리집에 모였던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무슨 일이었는지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게 되었다. (아무리 기억해보려 해도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음악이 보니엠의 원웨이 티켓이었던 건 기억이 난다. 그런데, 세상에 나무토막도 그런 나무토막들은 처음 봤다. 발과 팔이 같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세 친구의 엉덩이는 죽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내숭이나 수줍음 때문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의욕은 충만하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분명했다. 배운 적도 없는 어설픈 스텝을 알려주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마도 이 도토리들 중에서 나는 약간 길쭉하게 생긴 도토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후로 이 아이들은 나를 진정한 춤꾼으로 추앙했다. 



“풉!”


하마터면 물까지 뿜을 뻔했다. 내가 춤은 쫌 추지 않냐는 내 말에 딸아이의 격한 반응이었다.


“아니 왜, 나 춤 잘 추는데.”

“엄마는 그냥, 흥이 많은 거지 춤을 잘 추는 건 아냐.”


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닭똥집 같은 아이의 입술을 한 대 콕 쥐어박아주고 싶었다.


“오빠도 그렇잖아. 흥이 많아서 분위기를 띄우기는 하는데 춤은 영 아니잖아. 엄마 닮아서 그런거지 킥킥.”


생각해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파트 커뮤니티에서 운영하는 G.X 종목중 요가를 신청해서 6개월 째 하고 있다. 사람들과 안면이 트이고 간혹 한 두마디 나누다 보니 수 금요일에 요가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 화 목요일에 줌바 수업에도 등록했다고 한다. 단지 안에 있으니 입던 옷차림으로 휭하니 갈 수도 있고 수업료도 저렴하니 좀 좋으냐며. 거기에 덧붙여 ‘안 하면 바보지.’ 라는 말이 꽂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줌바에 등록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반의 수업 방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새 음악에 맞춘 동작을 최소한 시작할 때는 스텝부터 가르치기 마련인데 이 곳에서 하는 줌바는 그 단계가 없다고 했다. 즉, 언제가 됐든 그냥 앞 사람이나 강사가 하는 걸 따라서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배워도 어려울 텐데 배우지도 않고는 도저히 즐길 자신이 없어 등록할 수 없었다. 바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내가 알던 내가 아닌 부분은 또 있다. 책을 빌려서 읽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반납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다 읽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책을 사다보니 집 안에 책 벽이 점점 높아졌다. 그렇다고 독서량이 엄청 많은 것도 아니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점점 쌓여가는 것에 뭔가 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중 엄마에게서 뜻밖의 애기를 들었다.


“느이 아부지가 만날 그랬어. 이다음에 넓은 집 사면 방 하나는 책으로 채울거라고. 그러더니 자기는 일찍 죽어 해보지도 못하고 그걸 자식들이 하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오빠와 내가 사진을 찍는다고 카메라를 들고 다닐 때 엄마는 


“즈이 아범이 그렇게 사진찍는 걸 좋아하더니 어쩌면 자식들이 그런 것까지 고대로 닮네.”


라고도 했었다. 책을 사고 사진을 찍는 일 모두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일을 실현하는 거 였을까? 말이 안 되는 얘기라는 걸 안다.

요즘은 가끔 내가 낯설 때가 있다.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꽃만 보면 카메라를 들이대고, 조용한 시골에 살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이사를 하게 된다면 북적거리는 서울로 가고 싶다. 트로트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산책길에 지나가는 자전거에서 들리는 트로트 음악에 걸음걸이가 경쾌해진다. 다음에는 어떤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 긴장되는 한 편 기대도 된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알던 나는 내가 맞다. 나는 다만 시간을 따라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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