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강사가 물었다. 왜 한국 사람들은 새해 첫날에 해를 보러 산이나 바다에 가느냐고.
너무 익숙한 일에 뜬금없이 ‘왜’냐는 질문을 하니 수강생 세 명은 잠시 얼떨떨했다.
그리고는, 새 해 첫 해가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소원을 빌거나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 같다고 대충 설명이 모아졌다.
그 다음 질문은 당연히, 그래서 너네들도 그 해를 봤느냐고 물었다.
수강생 1은 늦잠을 자느라, 2는 관심이 없어서, 3(나)은 숙취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강사는, 자기나라에서는 보통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파티를 하며 술을 마시면서 새해를 맞기 때문에 보통은 새해 첫날은 숙취로 잠을 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새벽부터 해를 보러 등산을 하거나 바다에 가는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새해의 첫 해는 아니지만 새벽부터 해를 보려고 산에 올랐던 적은 나도 몇 번인가 있었다.
이제서 얘기지만 솔직히 그게 좋아서 간 적은 없었다.
세계적인 사진가가 찍은 솔섬 풍경사진이 알려지면서 그 사진을 찍는다며 밤 새 버스를 타고 새벽 세 시부터 추위에 덜덜 떨며 해가 뜨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고
남해의 어느 산 꼭대기에 있는 암자에 일출을 찍는다고 캄캄한 길을 걸은 적도 있었다.
어디 일출 뿐인가, 한 번은 광안대교로 지는 일몰을 찍는다며 장산에서 추위에 떨다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을 내려오면서 나뭇가지를 밟아 미끄러진 적도 있었다.
뭔가 잘못됐는지 발을 디딜 수 없을정도로 무릎이 아팠는데 일행에게 민폐가 될까봐 아픈 내색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이 지금까지 선명하다.
K의 연수 동기들과 앙코르왓에 갔을 때 다음 날 일출을 보러 올 것인가 말것인가 의견을 묻는데 한 사람이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거 뭐 날마다 뜨는 해, 새벽잠 설치면서까지 볼 필요 있나요?”
캄보디아인 동기 둘이 가이드를 했고 한국인 동기 세 커플이 함께 했는데, ‘해’에 관심없는 팀과 이제 막 DSLR 카메라를 사서 사진에 열정이 무르익어 가는 한 팀 그리고 그 일행 중 가장 ‘형님’이었던 K와 내가 한 팀이었다.
일출을 찍어야 한다는 카메라맨동기와 해에 관심없는 동기의 말씨름은 은근히 팽팽했다.
다음 날 일출을 보러 갔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앙코르왓 배경으로 지는 노을이 너무 황홀해서 일출은 욕심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카메라맨 동기 혼자 새벽에 갔으려나?
연말이 가까워질 무렵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스카이라운지를 개방한다는 아파트 공지 방송이 나왔다.
동마다 옥상을 개방한다는 말인가 했더니 지정된 한 동만 그렇다는 말이란다.
오천에 가까운 세대에서 죽어도 새벽잠은 포기 못하는 사람수를 빼더라도
호기심에라도 가보고 싶은 사람들을 과연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건가? 싶은 의심부터 들었다.
일단 우리집에서는 아이들과 동생가족이 송년 모임을 하기로 돼있었다.
그 중에서 K를 빼고는 새벽잠 설치면서 일출을 보고싶은 사람은 없었다.
각자 가지고 온 음식들을 식탁에 늘어놓으니 주방테이블과 책상을 붙였어도 비좁다.
고마운 마음, 격려하는 마음, 희망적인 마음들이 모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의미있는 시간이 되어 마음이 달달해졌다.
아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잠자리에 들면서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 여느때 같으면 일어날 시간이었다.
잠결에 K가 ‘나 일출보고 올게’ 라고 말한 것 같았다.
열시쯤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으며 물었다.
“그래서, 일출은 보셨는가요?”
“아니.”
“왜?”
“내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고장났어.”
“헐...”
옥상 전용 승강기에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하필 그의 앞사람들이 올라간 후 고장이 났고
세대 승강기쪽은 여전히 줄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서 포기하고 들어왔다고 했다.
“잘 됐네 뭐, 거 뭐 날마다 뜨는 해, 굳이 사람들 북적거리면서 볼 거 있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해보다 26층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동네 풍경이 궁금하기는 했다.
생일 촛불을 끌 때, 추석에 보름달을 보며, 혹은 분수대에 동전을 던질 때에 보통은 소원을 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마땅히 떠오르는 소원이 없었다.
송년 파티에서 동생이 자기 방향으로 꽂혀있던 2024 케이크 초를 장난스레 그 자리에서 숫자만 돌려놓으니 내 위치에서는 4202가 되었다.
4202, 나는 이 세상에 흔적도 없을 시간이라 생각하니 문득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서인지 숫자 위에 켜진 촛불을 보면서 아마도 나는 소원이 떠올랐던 것 같다.
‘지금 달달한 이 기분을 자주 기억할 수 있기를.’
날마다 뜨는 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