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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Jan 06. 2024

동네 개 이름은 만만해 보여요?

지역 평생교육원에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지 꼭 일 년이 됐다.

작년 요맘 때 자꾸 우울해지는 기분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게 왜 하필 일본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올 삼 월에 예정된 삿보로 가족여행을 명분 삼았지만 우리집에는 일어 잘하는 사람 셋에 글자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한 한 사람까지 있으므로 나까지 입을 뗄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굳이 이유를 끌어다 붙이자면, 재료비가 들지 않아 접근이 쉽고 

한국어와 어순이 같아 그나마 조금 수월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주워들은 것 같아서다.

하지만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 그 것은 나만의 야무진 착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에 배우기 수월한 외국어는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뿐이다.

분명히 초급반이라고 알고 왔는데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자니

맨 땅에 헤딩하듯 몰라서 배우러 온 생초보는 나 하나 뿐이었다.

일어공부를 했지만 오래 됐거나, 중급반까지 하다가 직장 때문에 중간에 그만 두었거나 

하다못해 아이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거나 등 명분이 분명한 사람들 뿐이었다.

게다가 회화보다 단어에 집중하는 것이 수업 방향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강사는

일본한자 10단계를 5년 만에 끝낸다는 다부진 교육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제 발로 들어갔으니 포기하겠다고는 하지 못한 채 

아는 한자조차 읽는 방식이 다양한 일본한자 예습지옥에서 일년을 보낸 셈이 됐다.

지난 12월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전 날 아침 숟가락 놓고부터 시작한 과제가

밖이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끝났다.

책장을 덮는 나를 보고 K가 박수를 쳤다. 대단하다며.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것 같기는 하다.

어렸을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하버드도 갔겠네, 라며.

그리고는 저절로 푸념이 나왔다.


“내가 내가 만다꼬 이 고생을 사서 하나 모르겠네. 여행간다고 내가 말할 일도 없을 거고

그렇다고 내가 일본을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야.”

“......”

“영어만 해도 그래, 전에는 미국에 간다는 목표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뭐, 취업을 할 것도 아니고 입시를 치를 것도 아닌데... 에휴, 이게 다 쓸데 없는 짓이지.”

“그럼 토익 700점을 받으면 미국 여행가는 목표를 정하면 되잖아.” 

“...???”


하마터면 환호성이라도 지를 뻔했다. 금세 정신을 가다듬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칠백 점이라고라? 그거슨 미쿡여행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못박는 소리처럼 들립니다만”

“아니 왜? 당신 수준이면 충분하지.”

“어휴, 토익 칠백 점이 무슨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그 순간 K의 품에 안겨있는 단추와 눈이 마주쳤다.


“아줌마! 동네 개 이름은 만만해 보여욧?”


라고 눈으로 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요즘이 해피 메리 백구 황구 하는 시대도 아니고 개 이름이라고 쉬울리 없다. 



오늘은 아침 운동을 전에 가본 적 없는 길로 나섰다.

나는 따라가는 거고 길은 K가 잡았다.

이런 식으로 일부러 나서보지 않는다면 평생 한 번도 걸어볼 일 없는 길이다.

목적지로 정한 곳은 우리 동네보다 훨씬 길도 넓고 번화했다. 주변에는 전통시장이 있었는데

그 곳은 시장 안 길도 넓고 깨끗했으며 아직 오후가 되기 전 시간인데도 점포마다 생기가 넘쳤다. 시장 안을 다 돌고 나니 5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알림이 울렸다.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갓구운 빵을 사 가지고 다시 집으로 걸어서 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K에게 물었다.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서 제안한 게 아니라면 여행에 대한 계획은 있는 건가?”

“샌프란에서 샌디에이고까지 캘리포니아를 따라 내려오는 거지. 가다가 솔뱅이든 어디든 좋은 곳 있으면 며칠 머물기도 하고. 전에 갔을 때는 일정이 짧아서 너무 가는데만 급급했잖아.”


생각보다 빠른 대답에 내용도 구체적이라 조금 감동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조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토익 700점은 무리다.


“저기요, 점수 쪼끔만 깎아 주면 안 될까요? 한... 삼백 점? 헤헤”

“그게 절대 높은 점수를 말한 게 아니라니깐?”


대체 뭘 보고 내 영어실력에 대해 나보다 더 확신하는 걸까?

나는 또, 아이들도 남편도 그렇다는데 왜 나만 나를 믿지 못하는 걸까?

어찌됐든 어쩌다 나에게도 새해 목표라는 게 생겼다.

해가 바뀔 때마다,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게 나의 목표였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생긴 목표나마 막상 생기니 마음가짐이 전과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토익 칠백 점은 너무 추상적이지, 오픽으로 하면 어떨까 말해봐야겠어.’


은근 슬쩍 잔머리를 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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