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런던에서 마지막 날 밤에 특별전 때문에 취소했던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에 그래도 가야겠다며 입장권 예약을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K가 갑자기 암스테르담에서 하고 싶은 것을 방언이 터진 것처럼 줄줄 쏟아냈다.
“하이네켄 투어는 해야지. 명색이 네덜란드에 가는데 맥주 투어는 해야하지 않겠어?”
라더니
“크루즈랑 투어버스를 묶어 놓은 상품도 있네. 시간도 별로 없는데 이걸 그냥 할까?”
라며 이제까지 봤던 중 가장 적극적으로 여행계획을 한다.
집에 갈 때가 되니 이제 몸이 풀리나 싶어 반가우면서도 한 편, 좀 일찍 좀 그러지 싶은 마음에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2박 3일 일정이지만 가는 날 오는 날을 빼면 사실상 온전히 관광할 수 있는 날은 하루 밖에 없는 셈이었다.
한국에서 여행 출발 전 미술관 예약을 했다가 취소한 것을 다시 하려니 우리가 갈 수 있는 날에는 모두 매진이었다. 어찌어찌 검색을 다시 하기를 반복하다가 하나를 찾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금액이 처음 했던 것의 거의 두배였다. 포기하면 모를까 가려면 시간을 끌 여지가 없었다.
구글 지도를 보면서 예상으로는 오전에 투어버스를 타고 미술관, 박물관, 시장 등 내렸다 다시 타면서 갔다가 오후에는 느긋하게 크루즈를 타고 운하를 돌아보면 될거라 생각했었다.
미술관 예약시간은 투어버스 시작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가야했다.
트램을 타고 미술관과 박물관 등이 모여있는 동네에 내렸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건물을 지나면서 보니 그 것이 국립박물관이었다.
시간이 좀 넉넉하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너른 벌판을 지나 반고흐 미술관에 도착했다. 아홉시 예약을 한 사람들이 벌써부터 줄을 서고 있었다.
K2가 학교에 다닐 때 무슨 얘기 끝에 고흐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과제를 하던 중이었지 싶다.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엄마에게 K2는 자주 미술사며 그림, 화가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다. 벌써 십 년도 넘은 그 때 들은 이야기로 고흐, 정확히 말하자면 빈센트 반 고흐에 관심이 생겼던가 보았다. 여러 이야기 중에 그가 정신병원에 있었다는 말이 귀에 와 꽂혔다. 잘 모르지만 무척 힘든 삶을 살았나보다 하는 동질감이라도 생겼던 건지 모르겠다.
붓터치는 거칠고 과감한데 색감은 화려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의 그림에 자꾸 눈길이 갔고 어디선가 그 이름이 들리면 귀가 쫑긋해지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라나다 여행을 할 때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갔던 식당에서 우연히 한 테이블에 앉게된 네덜란드인 부부와 짧은 영어로 대화를 할 때에는, 만약에 내가 암스테르담에 간다면 그건 고흐 미술관에 꼭 가보고 싶어서 일 거라 얘기 했었다. 처음에 그들은 내가 말하는 반 고흐를 못알아 들었다. 사실상 그 사이 매끄럽게 이어지던 영어 대화로 ‘어? 나 영어 쫌 하나?’ 라는 자뻑에 빠졌던 것에 비해 그 짧은, 더구나 자기네 나라 화가의 이름을 못알아 듣는다는 것이 영 의아했다. 몇 번을 다시 말하더 끝에 눈치 빠른 아내가
“아하~ 혹시 번코큭! 말하는 거야?”
라고 물었다.
그 발음을 듣고보니 내가 하는 말이 그들이 듣기에는 외계어 같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어민이 하는 그 발음은 혀를 뒤로 삼켜 가래를 내 뱉듯이 했다.
아무튼, 동기도 개연성도 미약하기 짝이 없으나 십여 년 넘게 짝사랑하던 대상을 만나러 가는 것 같은 기분에 모처럼 가슴이 설렜다. 아는 그림 앞에서는 한동안 머물렀고 모르던 그림은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속삭였다. 막바지에 이르러 막 돌아서려는데 몇 안 되는 내가 아는 그림중 하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 전시장 가드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우리가 다다가자 80대 쯤으로 보이는 그는 빙그레 웃으며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이라고 하니 언제나 그렇듯 북한이냐고 또 물었다. 남한이라고 하니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으로 북한에서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보낸 건 매우 나쁜 일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되풀이 했다. 그렇죠 그렇죠 하면서 그런데 아몬드꽃 그림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뭐라고? 한다.
“아, 그러니까 아몬드 꽃인가? 아몬드 나무? 고흐가 조카가 태어난 기쁨을 표현했다는 그 그림 있잖.....”
말도 끝나기 전에, 몰라 네 영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네가 말해봐. 라며 K를 가리켰다.
K라고 별 수 있겠나. 소득없이 돌아서면서 어째 이거 남녀 차별인가? 싶어 기분이 찜찜했다.
다행히 아래층에서 그림을 찾았고 그림의 영어이름은 아몬드 블러썸이라는 것도 알게된 후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을 나와 낯선 거리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잘 모르는 곳이라서 그렇지 결국 호텔에서 가까운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K의 말에 일단 호텔에서 가까운 투어버스 승강장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예약했던 어플에 표시된 지점으로 가기 위해 자전거를 피해가며 길을 수도 없이 건넜다.
점심식사를 마쳤을 때만 해도 맥주투어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24시간 안에 무제한 타고 내릴 수 있는 버스를 타고 하이네켄공장에 갔다가 크루즈를 타러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꼬였다. 승강장이라고 표시 된 곳에 도착했으나 빨간색 이층버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투어시간이 바짝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택시라도 타고 가야하나 생각했지만 투어시작 15분 전에 도착해야한다는 말을 K가 그제서야 했다.
거의 십만 원에 가까운 돈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난 일에 연연하는 나와는 달리 포기가 빠른 K는 크루즈를 타러 가자고 했다.
그 과정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배를 타는 곳에 줄을 서서 순서가 되니 티켓부스에 가서 개찰을 하고 와야 한다며 돌려세웠다. 그건 또 어디냐며 헐레벌떡 중앙역 광장을 반바퀴 돌아 티켓을 오픈한 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결국 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