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 할 때면 방 정리를 해.”
“......?”
“왜 그런 거 있잖아. 여행 중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상황이 됐을 때 누군가는 내가 살던 방을 돌아볼 거고 그러면서 내가 살았던 모습을 추억할텐데 그 때 방이 어질러져있으면...”
올케한테 였는지 딸이었는지 아들이었는지 누구와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분명한 건 말을 하면서도 ‘어!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말이 멈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이 어떻게 마무리 됐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것 같아 공연히 분위기가 머쓱해졌었다.
어디선가 어머니가 아버님께 자주 하시던 잔소리 한 구절 (거 술좀 작작 마시지.)이 들리는 것 같다.
대청소를 하고 침구는 세탁해서 넣어두고 사용하던 식기들까지 정리해서 올려두고 쓰레기통을 비운다. 어느 해엔가 제주도로 한달 살이를 갈 때에는 냉장고를 정리해서 플러그를 빼놓기까지 했었다. 마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방 정리가 의도한 습관이었다면 나도 몰랐던 습관이 또 하나 있었던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다시 미국 여행을 계획했었다.
십이 년 전 미국에 살 때 추수감사절 연휴에 캘리포니아 미션순례를 했었다.
샌디에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이어진 스물한 개의 미션을 돌아보자는 목적이었는데
그걸 삼박 사일 일정으로 잡았었다.
미국을 몰라도 한참 몰랐던 무지한 계획이었다는 것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도 전에 미친 듯이 운전만 하던 K의 퀭한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다녀올 곳이 아니라는 깊은 깨달음과 함께 언젠가 여유롭게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첫 번째 계획을 하고 항공권 구매를 하려던 찰라 코로나상황이 심각해졌고
두 번째는 미국을 계획했다가, 그래도 아직 이탈리아에 못 가봤다는 K 때문에 계획을 변경했다가 취소를,
작년에는 역시나 시작은 미국이었다가, 이 것이 이 생에서 마지막 장거리 여행이 된다면 그래도 가 본 곳 보다는 안 가본 곳에 가야하지 않겠냐며 런던 암스테르담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그 쯤 되면 미국은 인연이 아닌가보다 했어야 했지만 어쩐일인지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역마살에 의한 방랑벽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캘리포니아에 가고야 말테다!’ 라는, 누가 묻지도 강요하지도 않은 결심을 하고는 항공권부터 예매하기에 이르렀다.
K로 말할 것 같으면 스스로 벌이지는 않아도 누군가 판을 깔아주면 금세 생기가 도는 타입인 것을 이용할 꼼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틀렸나보다.
그랜드캐년 투어를 예약한다는 둥, 렌터카 예약을 부탁한다는 둥 나 혼자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도 K의 태도는 일관성있게 시큰둥했다.
회유 협박 읍소(?)를 해봐도 그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고 그럴 때마다 하는 말은
“가기로 했으면 그냥 가는 거지.”
로만 일관했다.
짜증이 슬슬 올라오기도 하고 막연한 마음에 불안감마저 스멀스멀 스치는 순간
최저가라고 예매했던 항공권 자리지정에 문제가 생겼다.
경유편에 지정할 수 있는 좌석이 하나 밖에 표시되지 않았던 거다.
몇 번을 다시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확인차 사이트에 접속하려고 했으나 예약번호와 이메일주소를 넣는 로그인 방식이 매번 오류가 떴다. 유일하게 표기된 고객센터 전화는 ‘이미 걸려온 다른전화’ 때문에 일박 이일이 지나도록 연결이 안 되고 1:1 문의를 하려니 예약번호를 확인할 수 없다며 거부당했다.
짜증지수 최상급이 됐다.
미국은 무슨 미국, 한 번 가봤으면 됐지 뭘 또 가려고 그래?
라며 비웃기라도 하듯 상황은 어쩐지 내 편이 아닌 방향으로 점점 배배 꼬이는 느낌이었다.
하루종일 노트북과 폰을 번갈아 붙잡고 혼자 끙끙거리는 나를 알은체도 안하던 K가
다음 날 아침 폰을 한참 들여다보며 뭔가를 하더니
“좌석 있네 뭐. 내가 지정 했어.”
라며 어깨뽕이 잔뜩 들어간 자세로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그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이미 천정만정 다 떨어진 후였다.
미국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자는 마음으로 캐년투어, 호텔을 차례대로 취소했다.
가격, 옵션 비교해가며 눈이 빠지도록 찾아 예약했었는데 취소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됐다.
문제는 다시 항공권이었는데 어플에서 취소를 하려니 수수료부터 결제하라고 한다.
취소수수료가 발권수수료의 두 배라는 건 나만 모르고 있었던게 맞을거야 라고 위로하며
주말을 지나 신용카드 결제취소까지 숨조이며 기다렸더니 급기야 오늘 취소알림이 울렸다.
“아이고, 여행 갈 때마다 신발을 사줘서 신발 부자가 됐네.”
이건 또 뭔소린고 싶어 돌아보니 K가 신발장을 열어놓고 뿌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K와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신발을 샀다.
신발을 커플로 신고 싶다며 파리에 갈 때는 나이키에어를, 제주도에 갈 때는 워킹화를
홋카이도에 갈 때 방한화, 런던에 갈 때 르무통,
그리고 내 평생 미국신발이 제일 편했더라며 미국에 가면 신발 쇼핑만 한 짐 해올 거라면서도 그랜드캐년에 갈 때 신자고 경등산화를 샀었다.
“으응, 당신은 많이 걸어다니니까 신발 사주는게 아깝지는 않아.”
라고 말하면서도 너 때문에 미국에 못갔으니 도로 반납하라고 하고 싶을 걸 꾹 참았다.
나도 몰랐던 나의 여행 습관은 신발사기였나보다.
그 신발이 앞으로도 쭈욱 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