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돋보기를 샀던 날 친구에게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안경 쓴 애들이 부러웠다며 나도 써보고 싶었다고.
“그것도 어릴 때 얘기지 나이들어서 안경 쓰면..? 그냥 할머니야.”
“......”
그러면서 안경 쓰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했던가?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K는 오래전부터 생활한복을 입고 싶다고 했다.
워낙 별나고 독특한 걸 좋아하는 타입이라 그냥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한복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던가 보았다.
옷 사달라고 칭얼거리는 애처럼 이따금 한 번씩 한복 타령을 했고
어쩌다 애들이 모였을 때는, 아빠가 개량한복 입고 싶다고 하는데 엄마가 안사준다,
며 고자질까지 하는 모양이 어이없어서 결국 한 벌을 사 주었었다.
몇 번 입다 말겠지 했던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K는 이후로 몇 년간 그 옷 한 벌을 입고 겨울을 났다.
생활 한복을 입고 동사무소에도 가고 부모님집에도 가고 친구를 만나러 가기도 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애들이 스님 같다고도 놀리고 할부지 같다고도 했지만 K는 그리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면 소재였던 옷의 소매부리가 듬성듬성 하얗게 해지고 옷감의 색도 빠져 추레해졌을 무렵
이제 그 옷 좀 버리자는 말에 어쩔수 없이 의류함에 넣고는 다시 새 것을 사달라고 했다.
안그래도 동네 아이들에게 강아지 할아버지로 불리는데 그런 옷 입으면 더 늙어보여서 안된다며 못들은 척 했다.
포기를 한 건지 이제 흥미가 떨어진 건지 한동안 별 얘기가 없었는데 며칠 전 근처 전통시장에 갔을 때, 늘 앞만 보며 직진하던 K가 자주 걸음을 멈추고는 했다.
뭔가해서 돌아보니 한복집 앞에 걸린 개량한복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아이고...아직도야?’
이쯤 되면 한 벌 사줘야겠다 싶으면서도 뭐 하나 안 오른 것이 없는 요즘의 미친물가를 생각하니 감히 가격을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안개가 짙어 창문에 수증기가 잔뜩 낀 것 같았다.
요 며칠 장염에 원인불명의 두통까지 와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몸이 처지니 마음까지 축 처져있던 터였다.
이렇게 있다가는 이렇게 살다 이렇게 죽을 것 같아 뭔가 밖으로 나갈 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부터 만날 말로만 하던 광장시장 빈대떡, 동대문 생선구이, 황학동 중고시장, 익선동 카페골목, 요즘 최근 핫하다는 서순라길에 가보고 싶었다.
K에게 가자고 하면 참 뜬금없다 할 것 같았다.
어떻게 말을 할까 하다가 퍼뜩 스치는 한가지가 있었으니.
“광장시장에 가서 생활한복 사고 빈대떡도 먹고, 아니다 지금 내 속사정이 거시기해서 밥을 먹어야 하니까 점심은 동대문시장 가는길에 생선구이를 먹을까?”
세상에...
살다살다 K가 내가 한 말에 그렇듯 재빠르게 반응하는 모습 처음 봤다.
말떨어지기 무섭게
“짧게라도 단추 산책을 먼저 시켜야겠지?”
라더니 어느틈에 단추데리고 쌩하니 사라졌다가 정말로 짧게 돌아 들어와 씻고 옷 갈아입고 가방까지 챙겨 외출준비를 끝내는데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살면서 K에게서 그렇게 들뜬 표정을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예전보다 다양해진 디자인과 색상의 생활한복이 잔뜩 쌓여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가격은 예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결혼할 때 시어머니가 맞춰주신 겨울, 여름, 춘추용 이후로 한복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두 아이 결혼식 때에도 드레스를 입느라 한복을 입을 기회는 없었다.
그렇다고 예복으로 한복을 입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오늘은 문득
설날에 가족이 모두 간편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는 그림이 참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의 것을 고른 후 내가 예정에 없던 개량한복을 입어봤다.
와, 이거 좋다며 딸하고 며느리 것까지 고르려고 하는 걸 K가 뜯어 말렸다.
흩어졌던 정신줄 부여잡고 생선구이집을 찾으러 갔다.
종로에서 동대문으로 가는 길은 분명히 이미 오래전에 몇 번이고 오갔을 거리인데도 처음인 것처럼 낯설었다.
서울구경 처음 온 사람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드디어 어디선가 매캐하게 생선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가자미구이를 먹겠다고 했더니 가자미는 서비스로 나오니 오징어볶음과 다른 생선을 시키라는 사장님 추천대로 주문을 하고 급기야 사심에 찬 생선구이를 숨도 안 쉬고 발라먹었다.
익은생선은 안 좋아한다던 K도 이제까지 먹은 것중 여기가 제일 맛있다며 만족해한다.
K도 좋고 나도 좋았으니 완벽한 일정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마음속 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동대문 생선구이를 먹으러 가려면 소원하나를 들어줘야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