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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아직 거기로 다녀요?

by 이연숙



여기서 ‘언니’는 남동생의 아내 즉, 올케가 나를 부르는 말이고 ‘거기’란 예전 살던 동네에서 다니던 미용실 얘기다. 동생네 하고는 약 3년정도 같은 지역에 살았었다.

인구 백만이 넘는 도시였으니 주소지에 같은 시를 적어 넣기는 하지만 버스로 다섯 정류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어 한 동네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렇게 산지 거의 2년 만에 알게 된 사실이, 올케와 내가 같은 미용실에 다니고 있었다는 거다.

사실상 단지내 상가에도 미용실은 있고 각각 지하철역 주변 상가지역, 게다가 대형 쇼핑몰이 세 곳이나 되는 즉, 하고 많은 미용실 중 그 곳이라니 우리는 놀랍고 신기해서 밥을 먹다 말고 하이파이브를 했던가?

제각각의 이유로 동생이 먼저 그 곳을 떠났고 일 년 후 나도 이사를 해서 그 동네에 다시 갈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갈 일이 있었다. 미용실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예치해둔 요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중교통으로 최소 세 번을 갈아타야 하고 체증이 심할 때는 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곳으로 단지 머리를 하러 가는 건 말이 안 된다면서.

혹시나 해서 말해 두자면 나는 예민하기는 하지만 까탈스러운 사람은 아니다.

여행다니면서 햇반 김치 고추장 굳이 가져가지 않아도 되고

내 집이 아니라고 잠을 못 자거나 화장실 볼 일을 못보고 그런거 없다.

아마도 너는 결혼식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말고는 메이컵을 안할 것 같다고 말하고는 왜 화장을 안 하냐고 묻는 영어강사에게 ‘외모에 자신있어서!’ 라고 말했다가 번개 맞을 거 같아서

‘응! 그냥 게을러서.’ 라고 바로 반성을 하고나서 멋쩍게 웃었다.

옷이며 신발은 편한게 좋고 화장은 왜 안하는지 생각해 본적 없을만큼 관심이 없다.

그런데 머리는 좀 달랐다.

그렇다고 엄청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한다거나 변화를 자주 주느라 그런것도 아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펌은 오로지 스트레이트로만 했는데 그러는 이유가 손질하기 쉬워서였는데도 그랬다.

펌을 하고 와서 스스로 손질이 잘 안되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며칠 끙끙 앓다가 결국은 다른 미용실에 가서 다시 펌을 할 때도 있었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를 만났어도 다섯 달 쯤 지나 다시 갔을 때 그는 자리를 옮기고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알게 된 곳이 지금 다니는 곳인데 그게 벌써 십 년이 넘었다.

내 사전에 한 미용실에 십 년을 넘게 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게다가 두 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간다는게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기기는 하다.

아직도 거기로 다닌다는 대답에 올케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그 곳의 요금이 어떤 수준인지도 잘 모른다.

처음 갔을 때는 첫 방문이라며 30% 할인을 해 주었고 일정금액을 미리 결제하면 이후로도 30%할인을 해 준다고 했지만 사실상 원가가 얼마인지도 모르니 갈 때마다 감액되는 요금에 대한 감각은 없다.

결국 요금 때문이 아닌 오랜 시간 내 성향이나 상황에 맞게 머리를 관리해주는 디자이너 때문이라는 게 맞겠다.


“이 번에는 어디로 가세요?”


어느 해엔가 한 해 동안 유럽을 무려 네 번이나 가게 됐을 때


“여행을 갈 거라 손질 편하면서도 예쁜 스타일로 해주세요.”


라고 말하기를 한 네 번 쯤 했더니 5년이나 지난 작년 가을, 몇 달만에 나타난 나를 보고 그가 하는 말이었다.


“아니 이번에는 여행이 아니고 아들 결혼식이요.”

“아 그러시구나, 따님 결혼한지는 5년 쯤 됐나요?”


듣고보니 내가 그 곳에 갔을 때는 대부분 무척 설레는 마음이었겠구나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결국 결과물은 그의 손끝에서 나온다.

그렇게 완성된 머리 모양이 한 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은 없다.

그래봤자 길거나 짧거나 웨이브를 조금 더 넣었거나 아니거나일 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는데도 그랬다.


머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지하철을 탄다.

내비가 알려주는 여러 가지 방법 중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코스다.

종점에서 출발하는 차를 타고 앉아서 책을 읽으며 가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 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먼 거리를 머리하러 다니는 게 엄마를 닮았네.

(고관절을 다치기 전까지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혼자 수원에서 연신내까지 머리를 하러 다녔다.)

나는 얼마나 더 그 곳으로 머리를 하러 가게 될까?

내가 그 곳에 못가게 되는 게 먼저일까, 그 디자이너가 일을 그만 두는 게 먼저일까.’


문득 그 것이 궁금해졌다.

전철이 바깥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따갑게 눈을 찔러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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