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방에는 서른두 살의 학사모를 쓴 아버지 사진 액자가 있다.
나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구나,를 생각하는데 엄마는 ‘저렇게 젊으니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라는 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 그 세상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거 없대. 당연히 못알아보지 그냥 각자 사는 거래.”
라며 말을 툭 잘라버린다.
들으나마나 그 다음 말은, 내가 빨리 가야하는데, 너무 오래 살았어, 로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이 틀렸다는 걸 드라마를 보면서 알게 됐다.
물론 누구도 그 곳에 먼저 가본 사람은 없으니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남편이 했던
“당신은 지금이 제일 예뻐.”
오랜시간 병석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기전 말을 기억하고 천국 앞에서 젊은 모습을 포기하고 팔십이 넘은 지금 모습을 선택한 주인공.
어찌어찌 남편과 나눴던 꿈의 집을 찾아 왔을 때 집에서 나온 그녀의 남편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녀도 놀랐고 나도 놀랐다.
그저 존재만으로 심쿵을 유발하는 배우라서 놀랐고 그가 여자의 남편이라는 데서 또 놀랐다.
이후로 여자는 젊은 모습의 남편에게 배신감과 후회, 그러면서도 행복감으로 혼란스러워하고 그걸 보는 동안 나 역시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어 편하게 봐지지가 않았다.
한동안 덮어 두었다가 최근에 다시 보기 시작했다.
천국이라고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구나 하다가 여자가 남편에게 실망해서 엄마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집중이 됐다.
드라마에서라면 천국에만 있으면 보고싶었던 사람을 모두 만날 수 있으니 좋겠다는 마음은 잠깐,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근거없는 고민이 스쳤다.
여자의 엄마를 만나려면 1950년대로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늙은 딸이 젊은 엄마와 만났다.
엄마는 단박에 딸을 알아봤다.
부부싸움을 하고 시간을 거슬러 친정에 갔고 다음 날 아침에는 남편이 데리러 오는, 이 세상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이 흘러가는 동안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팔십대 아버지가 육십대 아들하고 버스를 타면서 ‘어른하나 애 하나요.’”
하더라는 오래전 유머를 일본어 강사가 말했을 때 그 장면이 떠올라서 씁쓸하게 웃었다
드라마에서 여자의 모녀가 버스를 탄다면 그런 모습일까.
드라마와 같은 상황으로 우리엄마가 천국 문앞에 선다면 엄마의 선택은 물어보나마나 서른한 살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영어 수업에서 혹은 설문에 답할 때 ‘만약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으냐.’ 는 질문에 ‘지금이 가장 좋다.’ 라고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십 년 전에도 그 때가 제일 좋았고 지금도 지금이 가장 좋다, 는 말은 결국 돌아가고 싶을만큼 그리운 시절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천국의 문 앞에서 같은 선택을 해야할 때 나는 지금의 모습을, 아니 그 곳에 갔을 시점의 모습으로 살겠다고 하겠지.
그러면 나도 드라마속의 모녀처럼 늙은 딸이 젊은 부모와 재회하게 되려나?
누가 시키지도 않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상상을 하느라 일본어 숙제를 다 못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죽어서의 세상을 미리 추측할 수 없으며
십년 전이 좋았고 지금이 좋은들 이후 십년 이십년까지 좋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일단, 숙제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