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게 여행이란 일년에 한 번 남편 직장 연수원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보니 가고 싶은 지역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숙소가 거기 있어서 그 동네를 여행하는 상황이 되었다.
남편이 직장에서 부산으로 발령이 났을 때 아는 사람도 갈 곳도 없어 온종일 집에만 있는 나를 위해 그가 직접 신청해준 것이 지역센터에서 개설한 사진강좌반이었다. 사진을 찍혀본 적만 있었지 기계치에 가까운 내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이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다고 꽃꽂이나 바느질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 당시 이미 삼십년 쯤 된 시아버지의 골동품 필름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수업에는 나갔다. 나만큼이나 수업에 온 사람들 역시 온통 내향인들이었는지 주 일회 석달 수업이 끝나가도록 변변이 얘기를 나눠본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수업 날, 그 날은 야외 수업 즉 첫 출사를 나간다고 했다. 저녁 수업이었으니 이미 해가 진 다음이었다. 셔터를 열어놓고 빛 갈라짐 현상을 촬영을 하는 것이었는데 11월 영도다리 아래는 바람이 꽤나 차가웠다. 모름지기 사진이란 빼기와 기다림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라, 하는 강사의 가르침을 혹독하게 체감하는 수업이었다. 그 것이 수업의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종파티겸 첫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그야말로 생생한 사진과 여행에 대한 수업이 시작됐다. 뜨끈한 감자탕에 알코올 기운이 돌면서 그들은 각자의 여행담을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직장 동료와 셋이 네팔에 갔다가 거머리가 옷 속에 들어있더라는 A, 친한 친구 셋이 떠났다가 돌아올 때는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B, 초등학교 일, 이학년 아이 둘을 남편에게 맡기고 후배와 한달동안 터키를 여행했다는 C 등등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졌다. 여전히 내향인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무렵까지 집에서 가장 멀리 떠나본 것이 그 때 살고 있던 부산이었으니 말이다. 부산에 사는 동안 그 사람들과 모두 함께 혹은 서너 사람씩 소그룹으로 사진여행을 떠났다. 그 때만해도 나는 그 것이 여행이 아닌 수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군가 주말에 출사 다녀왔다는 내 말에 ‘잘 놀고 왔어?’ 라고 하길레 “뭔소리야, 사진찍으러 갔었다니까.” 라고 정색을 하며 바로잡기도 했었다.
스스로 준비해서 떠났던 여행은 대학 졸업을 앞 둔 딸과 함께 했던 이탈리아였다. 신기하고 설레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깊은 여운이 있다. 그 때부터였나보다. 내 안에 숨어있던 여행 본능이 깨어난 것이. 죽을 때까지 내가 유럽에 갈 일이 있겠나 싶었던 그 곳을 내가 걷고 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 때의 감동이 뭉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이후로 몇 년간 해마다 여행을 했고 어느 해엔가는 유럽을 무려 네 번이나 갔던 적도 있다. 팬데믹 때문에 여행하지 못하는 동안 돌이켜보니 무척 여러번인 줄 알았는데 고작 삼 년이었다. 여행이 다시 자유로워졌을 때에는 전보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불과 이 년이었지만 그 사이 남편은 퇴직했고 아이들은 결혼을 했거나 앞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사이 체력이 많이 떨어진 느낌에 당황스러웠다. 미국에 살았던 일 년이 그리워서 퇴직하면 꼭 한 번 여행오자고 했던 터라 예약을 했다가 취소를 한 것이 벌써 두 번이다. 그 때마다 이유는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편의 소극적인 태도인 것 같아 은근히 부아가 난 것도 사실이다.
미국 여행 대신 제주도에서 원룸형태의 숙소를 얻어 한 달을 살았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예고도 없이 서귀포 앞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고 뒤를 돌아보면 하얗게 눈을 덮어 쓴 한라산이 성큼 다가왔다. 강아지는 마당에 나오자마자 밤새 참았던 오줌을 누고 이리저리 뛰며 신이 났다.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그냥 이런데서 살자.”
“......뭐?”
“여행을 하거나, 싫으면 여행지 같은 곳에 살면 좋잖아.”
“......”
“바다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강아지 뛰어놀고 꽃 몇포기 심을 정도의 마당만 있어도 돼.”
남편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2025년 6월
좋은수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