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러 가면 엄마는 공차 먹고 아빠는 아메리카노만 먹는다?”
아이들과 만나면 K의 말문이 터진다. 그 날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공차는 아빠가 사주는데 엄마는 아빠한테 쿠폰으로 메가커피 사먹으래.”
말만 들어서는 세상 이기적이고 양심없는 엄마임이 분명하다.
근데, 그게 또 사실이기는 하다.
영화는 주로 오전에 보러 가는데 아침에 커피는 이미 마셨기도 한데다 마침 영화관 옆 건물에 공차가 있고 밀크티를 좋아하니 밀크티를 먹었을 뿐이다.
K에게 커피를 사라고 한 이유는 그가 커피를 좋아하는데다 하루 석 잔 이상을 마셔도 수면이나 위장에 아무 문제가 없어서이고, 산책을 해서 모은 포인트를 쿠폰과 바꾸는데 하필 메가커피가 극장 건물 일 층에 있었던 거다. K가 키오스크로 블랙밀크티 위드펄을 주문해서 받아주는데 가끔 한 번씩은 작은 사이즈가 너무 빨리 없어지는 것이 아쉬울 때가 있기는 했다.
어제 오전, 도서관 갈 거라는 K를 붙잡고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다.
으레 절차처럼 오층에 차를 세우고 일 층으로 내려와 공차에서 버블밀크티를 사고 메가커피로 가는데 그가 건네준 컵이 어째 전보다 키가 좀 큰 느낌이다.
기본 사이즈도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은 것을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점보사이즈로 주문했을리 없다. 아니면 사이즈업 행사라도 있는건가? 하면서 커피를 들고 온 K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어쩐지 그의 커피컵도 전하고는 달리 묵직해 보인다. 메가라서 원래 저랬나? 갸우뚱하면서도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저녁 준비를 하는데 두던 자리에 계량컵이 보이지 않는다. K에게 혹시 봤냐고 물었다.
보통은 못봤다거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고 할텐데 그가 즉답으로 명쾌하게 말했다.
“응 봤지. 옆 칸에 넣어놨어.”
컵을 꺼내면서, 왜? 냐고 물었지만 딱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건 말이야. 원래 두던 곳에는 컵을 겹쳐놓으니까 꺼내기 불편하고 또 손잡이가 튀어나와서 문이 덜 닫히더라고,”
전하고 다른 그의 태도가 신기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몸까지 돌려 쳐다봤다.
“웬일이야? 그렇게 자세하게 대답을 다 해주고? 그럼 말난 김에 아까는 공차랑 커피를 왜 큰 사이즈로 산 거였어?”
“에.... 또오.....”
사실 나는 계량컵의 위치를 바꾼 것보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빅사이즈 밀크티를 주문한 이유가 더 궁금했다.
“그게 말야, 모든 일에 다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
‘그럼 그렇지, 대체 뭘 기대한 거냐.’
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하던 저녁 준비를 마저했다.
‘안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 는 말이 사실이라면 K는 벌써 여러번 죽었다.
살면서 남편에게서 膳‘物’을 받아본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 번은 신혼 초 첫 생일에 생각지도 못했던 잠옷을 사가지고 온 적이 있었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은 연수 동기들과 여행을 앞 두고 동기 중 한 명의 조언을 듣고 14K 목걸이를 사들고 들어왔다. 그게 벌써 이십 년도 더 된 오래 전 얘기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면 같이 가서 사거나 현금을 주거나 가끔은 계좌이체를 해 줄 때도 있다. 어찌됐거나 현금이든 선물이든 받는 건 기분좋지만 그래도 두 번에 그친 현물이 소중해서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근래 들어 부탁하지 않았는데 불쑥 들고 들어와서 감동을 시켰던 것은 단연 딸기라떼였다.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무슨 생각으로 카페에 들어가 딸기라떼 살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책상위로 무심히 툭 올려놓고 돌아서는 모습이 섹시하게까지 느껴졌으니 그거면 됐다.
며칠 전 B를 만났을 때, ‘너 사진이 참 좋아.’라고 했다.
전 같았으면, ‘왜요? 에이, 무슨, 몇 백 컷을 찍어도 건질거 하나도 없는데.’라며 겸손인지 자폭인지 모를 얘기를 쏟아냈을 테지만 그 날은 그러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 좋은데요? 라고 말하는게 낫죠?”
라고 말했다. 말하고 보니 정말 내가 사진 잘 찍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올케가, ‘언니 그림 좋아요’ 라고 말하면, 에이 그럴리가. 라고 하는 대신 ‘그래 그치?’ 라고 해야겠다. 내 글을 읽은 친구가 ‘너 글 참 잘쓴다’ 라고 하면 ‘빈말인거 알아’ 라고 겸손과 불신 어디쯤 같은 대답대신, ‘고마워, 그렇게 말해주니 더 열심히 써야겠다.’라고 말해야겠다.
K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왜 대답을 안하냐, 내 말이 우습냐, 라고 화를 내기보다
말하기 싫은가보네, 하는 편이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꼼지락거리다 저녁준비가 조금 늦었다. 노트북을 덮고 주방으로 가려는데 K가 방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오늘은 회 사다가 소주 한 잔 할까?”
한다.
‘왜? 오늘 무슨 날이야? 계탔어? 로또라도 맞은 건가? 혹시 기분이 우울해?’
등등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다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