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져 빠진 것과 진득함의 차이

by 이연숙



오빠가 책을 보고 있을 때 엄마는 ‘쟤는 만날 진득하니 책만 본다’고 했다.

내가 책을 보고 있을 때 엄마는 ‘일은 안 하고, 차져 빠지게 책만 들여다 본다.’고 했다.

진득하다는 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긍정적의미인줄 알겠으나 차져 빠졌다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제 할 일을 안하고 딴데 정신이 팔려있다는? 뭐 아무튼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오래전에 가깝게 지내던 친구는 나보고 ‘소죽은 귀신’같다고 했다.

소죽은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말도 어찌보면 ‘차져 빠진’의 의미와 많이 닮았다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친구가 하는 그 말은 그리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다 나온 말이었다.

옷이 편하면 입던 옷만 입고 늘 먹던 음식만 먹고 주변에 분위기 좋은 카페가 매일 새로 생기는데도 처음 갔던 그 카페만 간다며, ‘패는 놈만 패는’ 내 습성이 소죽은 귀신같다며 친구는 그래서 내가 참 좋다고 했다.



저녁에 닭갈비를 먹을 거라고 했더니 K가 깻잎을 사러 간다며 바로 집을 나섰다.

깻잎을 사다 놓고는 하루 운동량을 채우지 못했다며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더니 또 밖으로 나간다. 돌아온지 얼마 안 돼,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걸 깜박했다며 휑하니 사라졌다.

집에 들어온 그에게 물었다.


“나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인 거 같지?”


내 딴에는 해야할 일을 미루지 않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그가 부지런하다는 의미로 엉덩이가 가볍다는 말을 하려다 자칫 부정적 의미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돌려 말한다고 한 것이었다. 아마도 엄마가 바라던 딸은 그렇게 바지런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필요한 물건이 있거나 가보고싶은 장소가 있어도 망설이고 주저하느라 길게는 한 계절을 보내고서야 겨우 움직이거나 혹은 생각만 하다 포기를 하기도한다. 바꿔 말하면 우유부단하고 게으르다는 의미로 내가 엉덩이가 차져빠지게 무거운 사람으로 보일까싶은, 제발이 저려 K의 생각을 물었던 거다.

그는 내 우려와는 다른 대답을 했다.


“무겁지, 당신은 뭐든 시작하면 끈기있게 하잖아.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앉아있는거 잘 못하거든. 그거 진짜 대단한 거야.”


그 말을 할 때 얼핏, 그가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말이 꽤나 위로가 되었다.

엄마에게 그 말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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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지는 더위에 몸이 여기저기 이상증세를 나타낸다.

밤이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느라 깊게 잠이 들지 못한다.

왼쪽에 누웠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누웠다가 다시 베개를 발치에 놓고 누웠다가 아예 침대 아래 바닥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느라 아침에 일어나면 한 바탕 전쟁이라도 치른 느낌이다.

잠의 질이 좋지 못하니 편두통이 떠나지 않고 눈꺼풀은 늘 무겁다.

그나마 하던 걷기 운동마저 양이 줄다보니 소화도 잘 안되고 관절이 다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구월이 됐다고 극적으로 기온이 내려갈 거라는 기대를 했던 건 아니지만

여전히 삼십 도를 웃도는 낮기온에 이제 정말 지치는 기분이다.

쿨하지 못하고 질퍽거리는 것이 미련 많은 헤어진 연인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 더위 참 차져빠지게도 물러설 생각을 안 하네, 라는 말이 툭 튀어나와 쓴웃음을 지었다.

계집애가 하라는 집안 일은 안하고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엄마에게는 차져빠지게 버티고 있는 더위와 같았나보다 생각이 들어서였다.


건너편 다른 단지 아파트 옥상의 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할 정도로 바람이 분다.

오늘도 여지없이 온도계는 30도씨를 가리킨다.

산책 나가려던 K가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우산을 가져가야겠다고 말하는 순간에 화창하게 해가 떴다. 바람이 세서 우산도 무용지물이겠다는 내 말을 들었을지 우산을 가지고 갔을지 모르는데 그 사이 다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습한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오늘은 에어컨을 켜지 않고 진득하게 버텨보려고 한다.

차져빠진 것과 진득함의 차이?

이제는 그게 그리 중요한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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