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3학년 무렵이었다.
연탄아궁이에 올려놓은 밥솥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뚜껑을 열어보니 쌀 위로 아직 물이 흥건했다.
당황해서 솥을 꺼내 급한 대로 물을 따라 내려고 솥을 기울였더니
물을 따라 쌀도 내려온다.
죽도 밥도 아닌 그 것을 먹었는지 버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한 그 것이 내가 생애 처음 밥을 지은 기억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사람마다 손의 크기도 다르고 두께도 다를 텐데
밥을 할 때 물높이는 손을 직각으로 꺾어 쌀 위에 얹은 후
손목아래 손등의 두 번째 주름쯤에 맞추면 된다고 했다.
일하는 엄마 대신 저녁밥은 내가 지었다.
유아기를 뺀 나머지 시간을 밥을 하면서 보낸 셈이다.
밥 짓는 노동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다면
약 이십 년 쯤 전에 졸업을 했어야 했다.
먹고 사는 일을 중단할 수 없으니
어느 시점 이후로는 기계적으로 밥을 했던 것 같다.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하면 십 년은 해봐야 한다고 한다.
TV에서 달인이라고 소개되는 사람들의 경력은 최소 삼십 년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집 밥맛이 좋다는 말을 가끔 들었다.
특히 엄마는 우리 집에만 오면 밥이 맛있다는 말을 했다.
휘** 압력솥을 써서 그런가보다며
집에도 밥솥을 바꿨지만 이상하게 이 집 밥 맛 같지 않더라고 했다.
전기 압력솥으로 바꾼 이후에도
내가 한 밥 맛은 떨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어떻게 현미가 반이나 섞인 밥조차 부드럽다며
우리 집에만 오면 밥을 달게 드셨다.
집에서는 까끌거려서 도통 잡곡을 섞어 먹지 못한다면서.
어찌됐든 칭찬이니 기분이 좋아야할 텐데
나는 밥 잘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릴 적 놀이터 대신 부뚜막 앞에서 보낸 기억들이 떠올라
어쩐지 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는, 요즘 속이 좀 불편해서
미역국을 국냄비에 찰랑찰랑하게 끓였다.
미역국을 끓일 때마다 K는 늘 국을 리필해서 먹었다.
이 번에는 마른 미역을 꺼내다가 양 조절에 실패해서
양도 많아져 간이나 맞을까 우려가 됐다.
"그거 있잖아, 강남에서 유명한 미역국 전문점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아."
우려와는 달리 과묵하던 그가 오히려 극찬을 한다.
"아, 뭐 그...그치, 내가 미역국은 좀 끓이지."
누군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닌
남이 해주는 모든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아이들과 함께 보냈었다.
아이들과 주말 나들이를 하는 중에 사위가 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어디서 하는 거예요?"
"우리 집에서 하지 뭐."
별 생각 없이 말했는데 아이가 되물었다.
"이번에는 컨셉이 뭡니까?"
"뭐? 뭔 셉?"
"작년에 우리 집에서 할 때에는 나름 이탈리아 분위기를 냈잖아. 스테이크에 광어 필렛, 시저 샐러드, 그리고 엄마가 아란치니 해 왔잖우."
"그게 그런 거였어? 그..그럼 이번에는 멕시칸?"
말 해놓고 급격하게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만들 줄 아는 멕시칸 요리가 있기는 했던가?
멕시칸 요리를 먹어만 봤지 종류도 모르면서 이게 무슨....
이제는 밥만 잘해서는 쓸 데가 없다.
햇반이 있으니 밥을 잘하는 게 그리 큰 대단한 일도 아니다.
밥보다는 때에 맞춘 분위기의 요리를 할 줄 아는 것이 대세다.
그나저나
엄마에게 나는
밥 잘하는 이쁜 딸이기는 했던 걸까?
오늘 갑자기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