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서 누룽지나 끓여먹자

by 이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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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취지는 송년 모임이었다.

동생네와 같은 지역에 살 때 지난 3년 동안에는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 송년과 신년을 함께 했었다.


그리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 사는 올해

그래도 해 바뀌기 전에 얼굴은 한 번 봐야하지 않겠냐며 만나기로 했다.

12월은 바빠질 테니 11월 중으로 날을 정했고

병원 치료중이라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점심으로 결정했으며

원님 덕에 나발을 분다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가보겠나 싶어

스페인 식당을 예약해 둔 터였다.

지난여름, 내 생일에 아이들이

엄마가 좋아하는 메뉴를 하는 식당 두 곳을 찾아 놨다고 했다.

멕시칸과 스페인 식당이었는데

코로나 상황이 심각했던 시점이라

포장이 안 된다고 해서 탈락했던 곳이 그 곳이었다.

결정 중증 장애를 앓고(?) 있는 나에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하여 결정 되었던 멕시칸 요리 맛있게 먹고서도

가보지 못한 그 식당의 빠에야와 타파스가 종종 어른거렸었다.


드디어 한을 푸는 날

너무 일찍 도착하면 촌스러워 보일까봐

일부러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식당 앞에 도착 했을 때,

약속시간에서 1분이 지나있었다,

사람이 너무 시간에 딱 맞추고 그러면 없어 보일까봐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분들 아직 안 오셨다.

역시나 강적이시다.

약속시간에 맞추려고 너무 급급해하는 쪼잔한 타입 아니시다.

10분이 지나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오는 K와 나란히 입장하신다.

그 모습이 어찌나 품위있고 여유로워 보이던지

역시 사람은 느긋해야 대인배처럼 보인다.


메뉴책을 펼쳤다.

내가 너무 오래 외식을 쉬었는지

메뉴판 가격의 숫자가 영 낯설다.

짧았던 스페인 여행 경험으로 보자면

타파스류는 작은 접시에 담긴 해물 등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저렴한 가격에 맛 볼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가격이 비싸면 혹시나 양이 많아 남기게 될까 걱정을 하면서

먹어 봤던 것, 들어 본 것, 누가 먹는 걸 봤던 것 등등

1인 1메뉴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오마이갓!

대체 저렇게 귀여운 팬은 어디서 팔까?

싶을 만큼 작은 빠에야 냄비

감바스 역시 혼자 먹기에도 서운할 양에다

앙증맞은 접시에 담긴 하몽 샐러드

가격은 거의 두 배 인데

양은 스페인에서 봤던 그 정도 수준인 각종 타파스

접시가 하나씩 빌 때마다

군중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빠에야 팬의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 먹은 후

파스타라도 더 주문할까? 라고 했더니


“됐어, 그냥 집에 가서 누룽지 삶아서 김치하고 먹자.”


라고 동생이 말했다.

나는 소원도 풀었고 스페인 생각도 났고

음식도 좋았다는 말을 마음속에만 넣어두었다.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차에 탔을 때

출발하면서 K가 한 마디 덧붙인다.


“음식 맛은 잘 모르겠고, 양이......”


나도 안다, K에게는 포만감이 곧 맛이라는 것을.

이래저래 내 사심만 채운 송년 모임이었다.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보고

먹고 싶었던 음식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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