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이른 봄이었다.
막내 이모가 편물기계로 짜 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위는 빨간색 긴팔이었고
치마 부분은 까만색 플레어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그 원피스를 기억하는 걸 보면
그 옷을 좋아했던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다.
원피스를 입고 집에서 나왔다.
이모의 뾰족구두를 신고 뒤뚱거리며 마당을 지나 옆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니 대문이라고 했지만
길이가 제각각인 헌 나무판자를 이어 고정 시켜 놓아서
여닫을 때마다 휘청거리는, 사실상 길과 그 집 사이 경계라는 편이 맞겠다.
마당에서 바깥쪽으로 여는 문이라 힘들여 당겨 열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3월 매서운 먼지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에 판자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어디선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날린 흙이 눈에 들어가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당에서 놀던 닭들이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더니
그 중 제일 덩치가 큰 놈이 순간 날아올라 내 팔꿈치를 쪼았다.
세상이 뒤집어 지는 것 같았다.
뾰족구두는 벗겨져 발목을 삐끗했고
나는 눈을 비비며 울음을 터뜨렸다.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밀어봤지만
반대 방향으로 몰아치고 있는 바람 때문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둠속에 혼자만 버려진 것처럼 무서워서
세상 서럽게 목 놓아 울었다.
어떻게 그 곳에서 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도 3월이 되면
먼지 회오리 속에서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세상 다 잃은 것처럼 울고 서 있는 아이가 문득 떠올라서
바람 때문인지 기억 때문인지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는 한다.
가끔, 그 봄의 한 부분이 삽화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곳에 살았던 기간은 길어야 2년 정도이고
동생이 그 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나는 기껏해야 세 살에서 네 살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억은 왜곡되게 마련이라 치더라도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내가 대체 그 봄에 그 집에는 왜 갔던 걸까?
엄마가 집에 왔을 때 그 얘기를 하다가 불쑥 주민등록 초본을 떼 보자고 했다.
이전의 거주지 기록이 어디까지 나오는지 궁금해서였다.
엄마도 관심이 가는 모양으로
겉옷 챙겨 입고 민증 들고 천천히 걸어서
행정복지센터까지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삼십 분 걸려서 갔다.
그런데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전 거주지 주소는 모두 나오지 않았다.
엄마의 시간 중에는 일제 강점기도 있었고
한국전쟁도 있었으니 그 때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태어났다는 용산이나 동생이 태어난 일산 주소 정도는 혹시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엄마의 거주지 주소는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의 집부터 시작됐고
나의 것은 결혼하기 바로 전 전에 살던 집부터 기록이 남아있었다.
옆집은 체장수네 라고 불렀다.
체를 만들어서 팔았나 보다, 라고 짐작할 뿐
만들거나 파는 것을 본 적도 없었고 심지어 그 집 사람들을 본 기억도 없다.
체장수네라고도 불렸지만 남수네라고도 불렸다.
남수는 그 집 아들 이름이겠지만
실물을 본적이 없는 건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남수는 머리에 진물이 나서 늘 머리를 밀어 빡빡머리였고
코도 흘려 애가 좀 꾀죄죄하다, 는 말이 엄마의 억양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남수를 좋아했었....나?”
엄마가 풉! 하고 웃었다.
내가 말을 하면서도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남수가 착하고 잘생기고 똑똑한 아이였으면 좋을 뻔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이모가 짜준 생애 첫 원피스를 입고 헐렁한 뾰족구두까지 신고
마침내 용기를 낸 상황이었다면
그 봄의 기억들이 조금 더 풍성하지 않았을까?
무려 세..세 살, 혹은 네 살 무렵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