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데 모르는, 매콤한 소재에 뒤따르는 어두운 시대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마!
1980년대, 엄혹한 군사정권의 통제 아래
'3S 정책(Screen, Sports, Sex)'이 은밀하게 작동하던 시절,
'애마부인'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신드롬이었다.
성적 해방의 아이콘이자 시대의 욕망이 투영된 존재.
그러나 동시에 외설이라는 폄하와 검열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던 양면적 존재이기도 했다.
수십 년이 흘러 이제는 하나의 단어만 아련히 남은 이 이름이 넷플릭스 시리즈로 돌아왔다.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 뒤에, 드라마 <애마>는 실은
1980년대 충무로를 배경으로 한 여성들의 분투와 예술가로서의 신념을 담고 있다.
과연 <애마>는 이 매력적인 소재를 어떻게 풀어냈는지,
그 기획의 영리함과 작품의 아쉬움은 어디에 있었는지
현대로 넘어온 <애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어떤 이야기로 재탄생했는지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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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소재로서의 가능성을 먼저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애마부인을 제작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픽션 코미디,
즉 가상역사물로 설명되는 본 작품은 소재의 이점을 한껏 담고 있다.
첫째, '애마'가 가진 기시감과 신선함.
<애마>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민주화 운동이나 소시민의 삶 같은 익숙한 소재 대신
'에로 영화 제작 현장'이라는 파격적인 공간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당대의 상징적 이름인 '애마부인'은 이제 그 실체를 아는 이가 드문,
이미지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 이미지만 남은 점이 오히려 이점이다, 낯설진 않지만 그렇다고 친하진 않은 그런 존재.
바로 이 지점에서 기획의 영리함이 돋보인다.
기성세대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이름이 가진 도발적인 이미지에서 오는
'새로운 자극'을 선사하며 세대를 아우르는 호기심을 효과적으로 유발한 것이다.
옛것이지만 진부하지 않은, 영리한 선택이 기획에서 이뤄졌다.
둘째, 한국적인 소재와 보편적인 영웅 서사의 결합
나는 <오징어게임>이나 <D.P>, <킹덤> 같은 작품이 한국 창작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었다고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이 한국의 놀이 문화로 자본주의의 비극을 그려내고,
<D.P>는 한국 군대의 부조리와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킹덤>은 옛 한국을 배경으로 좀비라는 재난 요소를 곁들였다.
그리고 <오징어게임>과 <킹덤>은 말할 것도 없고 <D.P> 역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애마> 같은 이야기가 제작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애마>와 같은 시대극은 문화적 장벽이 높은 장르일 수 있다.
하지만 <애마>의 서사는 단순히 한 시대의 에로 영화 제작기를 넘어
권력과 자본에 억압받는 예술가의 투쟁이라는 보편적 서사를 품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을 지키려는 감독, 성적 대상화를 거부하고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은 여성,
그리고 이들을 억압하는 제작사의 부조리한 대립은 국적과 시대를 넘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영웅 서사'의 원형을 닮았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택한 자신감의 배경에는, 이처럼 세계 시청자들에게도 통할 수 있는
보편적 코드가 있다는 단단한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셋째, 현실적인 범위 안에서 작동하는 영웅극이다
6부작의 드라마는 그 전반과 후반부의 톤이 사뭇 다르다.
4화를 기점으로 코미디가 섞인 영화를 위한 영화에서 사회비판의 저항극으로 바뀐다.
위에서 언급했듯 '애마'는 소재로 기능한다.
<거미집>처럼 영화에 몰입하고 그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보단
당시 군부정권에 통제당하는 시민, 그중 한 사례로서 영화인들을 비췄고 영화인들을 보여준 것이다.
통제당하는 사회 속 한순간 억압과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영화, '애마'를 사용한 것이다.
이 영웅 서사는 보편적이기에 더욱 긍정적이다.
나는 드라마엔 분명 관객들에게 익숙함을 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애마> 속 인물들은 세상을 구하는 거창한 영웅이 아니다.
권선징악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쩌면 밋밋한 결말, 비현실적 결말 두 개 중 양자택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애마>는 꽤 괜찮게 정도를 조절했다
이들은 거악을 단번에 무너뜨리거나 민주화를 외치는 대신, 자신의 존엄성과 동료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남성의 시선으로 난도질당한 필름을 되찾아 '감독판'을 상영하려는 감독의 분투
후대의 배우들이 착취당하는 걸 막기 위해 생방송에서 비리를 터트리는 유명 탑스타
이는 거대한 담론이 아닌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시민적 영웅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이처럼 <애마>는 영웅의 서사를 비현실적인 판타지가 아닌,
한 발을 현실에 딛고 선 공감 가능한 이야기로 그려냈다.
바로 이 지점이 시청자들이 이들의 투쟁에 마음 깊이 이입하게 되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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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쉬움은 존재한다.
기획의 장점도 뚜렷하고, 셀링 포인트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무작정 좋은 작품이라고 추천하기엔 확실히 조금 아쉽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이다.
OTT 시리즈의 미덕은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다음 화를 누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력한 추진력에 있다.
하지만 <애마>는 때때로 밋밋하게 흘러가거나,
이야기의 핵심과 무관한 코미디 시퀀스가 길게 이어지며 맥을 끊는다.
여러 인물의 서사가 각자의 목소리를 내지만,
이들이 희란과 주애의 중심 서사와 유기적으로 얽히지 못하고 흩어지면서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다.
잘라냈어도 무방했을 장면들이 있다는 인상은, 속도감이 생명인 OTT 플랫폼에서 분명한 약점이다.
사실 이러한 감상들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다시 보면 다르게 다가올 수 있지만, 어쩐지 필요 없는 장면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폴고와 희란의 마지막 옥신각신, 근하 캐릭터의 존재감 부족 등 당장 생각나는 씬만 해도 여럿이다.
또한, 희란의 원맨쇼로 흘러가는 서사 역시 아쉽다.
작중 희란, 주애, 곽감독 등은 여성이, 희란과 주애가 멋있게 나오는 애마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보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애마>에선 편집도 안 당했는데 주애의 주체적인
문제 해결은 희란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 즉, 둘 다가 아니라 희란만 멋있게 나오는 '애마' 같다.
희란은 주체적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동료들을 구하며, 부조리를 고발하는 영웅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핵심 인물인 '주애'는 성장의 기회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다.
마지막에 말 타고 희란을 구해주는데, 이 드라마에서 유치하게 느껴진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이다.
희란이 외부의 적과 싸우는 영웅이었다면,
주애는 내면의 두려움과 싸우며 성장하는 또 다른 축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희란의 조력자로 기능할 뿐,
주애의 성장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가능성'을 보이는 데 그친다.
두 여성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더 입체적으로 그렸다면,
드라마가 말하고자 했던 '연대'의 메시지는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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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애마>는 흥미로운 소재와 사회 비판,
그리고 보편적인 영웅 서사를 버무려낸 매력적인 기획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 좋은 재료들을 하나의 완성된 요리로 빚어내는 과정에서
편집의 리듬감과 인물 균형을 조율하는 연출의 힘이 다소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낡은 이름을 꺼내 들어
현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아내려 한 그 도전만으로도
<애마>는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한국적인 소재를 활용해 도전하는 창작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