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었다. 부모도 모를 점의 위치를 알았고, 충치가 어디 있고 몇 개인지도 알았으며 첫 키스 상대가 누구인지, 누구와 언제 어디서 첫 경험을 했는지도 알았다. 불시에 자취방으로 들이닥친 어머니에게 남자 운동화가 있는 이유를 설명하느라 그녀로 하여금 진땀을 빼게 만든 운동화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나였고, 그때 나는 비좁은 옷장에 숨어 땀을 뻘뻘 흘리며 난생처음 신을 찾았다. 본의 아니게 신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었다.
떠올려 보면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더 많았다. 그러나 관계가 끝나갈 무렵엔 분명 나쁜 순간들이 가진 힘이 훨씬 셌다. 결정적인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이미 그녀도 나도 그 순간을 극복해 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박약해져 있었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불안이 더 컸고 나는 그 반대라서 그랬는지 어려서 그랬는지 도무지 합의점이 찾아지질 않았다. 나는 군대로 도망쳤고 그 사이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났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내를 만났을 즈음에는 나쁜 감정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도 좋은 감정으로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했었다.
“언제 들어온 거야?”
“한 8, 9년쯤 됐나?”
“결혼은?”
그녀가 반지 낀 손을 들어 보인다.
“어디 사는데?”
그녀는 노들섬이 보이는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자가든 임대든 자산의 격차가 최소 열 배에서 서른 배 이상이라는 소리다. 가끔 강변도로를 탈 때면 생각했다. 저기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까.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낼까. 한강에서 하는 불꽃놀이를 자기 집 거실에서 보는 기분은 어떨까.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안.녕.하.세.요.”
화장실에서 본 금발의 백인 남자다. 그녀와 나 사이로 장난치듯 뛰어든 남자애를 남자가 붙잡아 세우며 그녀에게 영어로 누구냐고 물었다. 아, 이 남자랑 결혼했구나. 저 애가 아들이었구나.
“대학 때 잠깐 사귄 친구. 엑스 보이프렌드.”
그녀가 쿨 하게 나를 소개했다.
“오! 만.나.서.반.가.워.요.”
남자가 노란 털이 북슬북슬한 희고 두툼한 손으로 악수를 청한다. 손바닥이 기분 나쁘게 축축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하며 슬쩍 손을 닦았다. 남자애가 눈치챘나 싶게 빤히 나를 쳐다본다. 분명 우리말로 인사를 했는데 “나이스투미츄, 투”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남편.”
그녀가 그를 소개하자 그가 그녀에게 또 영어로 무어라고 하더니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외국인 특유의 억양으로 서툴게 한국어로 말했다.
“이.야.기.나.누.세.요.다.음.에.또.봬.요.”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남자애의 작은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나는 그가 한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 알아들은 척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구슬픈 뽕짝이 요란하게 대화의 공백을 메운다.
“뭐 하시는 분이야?”
“변호사. 뉴욕에서 만났어. 유학 갔을 때. 지금은 국내 로펌에서 국제 특허 외국법 자문을 하고 있지.”
“그렇구나.”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인 것 같네.”
이별 통보는 내가 했다. 편지에 명확히 그렇게 썼다. 군대에서 보낸 첫 편지였다. 답장은 오지 않았고, 그걸로 끝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때 일을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낭만적인 해후를 꿈꾼 적이 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좋은 이별로 남고 싶었다.
“여기 영어 마을 프로그램이 괜찮더라고. 내년 말이나 내후년 초에 시카고 쪽으로 이사할 예정인데, 애가 영어를 못해. 웃기지? 집에선 영어를 거의 안 쓰거든. 남편이 한국말 쓰는 걸 재밌어해.”
“시카고?”
“시아주버니랑 무슨 사업을 하려나 봐. 오크파크라는 곳인데…”
“오크파크? 헤밍웨이 고향이잖아.”
아바나 티셔츠를 내려다봤다. 그 꿈이 여기까지 이어졌다. 예지몽이었을까. 미지의 여인은 그녀였을까.
“잘난 척은 여전하네.”
그녀가 픽, 하고 웃는다.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네 아들은 군대 안 가도 되겠다. 복수국적이잖아.”
“모르지 뭐, 한국 국적을 선택할지도. 아무튼 대학까지는 거기서 보내려고. 남편도 동의했어.”
“아이비리그?”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말을 돌린다.
“결혼은 했어?”
나쁜 결말에 이르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나는 나무를 보지 못했고 그녀는 숲을 보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이 방아쇠가 될지 서로 잘 알았다.
“했어.”
“했어? 진짜? 언제? 누구랑? 뭐 하는 사람인데?”
“안 믿어지는 모양이다?”
“궁금하잖아. 대체 누가 널 데려갔는지.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그 무렵 나는 무슨 허브 농원 대표의 자서전을 대필하고 있었다. 아내는 과학교양서 번역 건으로 출판사를 찾았다. 돌아가는 길에 같은 버스를 탔고, 의외로 대화가 끊기지 않아 반가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블로그 주소를 교환했다. 우주인 선발 대회 후기가 호기심을 끌었고 마침 <그래비티>가 개봉 중이라 함께 보러 갔었다. 그날의 인연이 바야흐로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글은, 아직 쓰고 있어?”
“쓰고는 있어.”
“꿈을 이룬 건가.”
“꿈?”
그런 걸 꿈이라고 할 수 있나.
“해리포터 같은 거 하나 써야지. 베스트셀러 작가 되면 모른 척하기 없기다.”
다른 장소에서 홀가분하게 마주쳤다면 모험을 해 볼 수도 있었을까. 이를테면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둘 다 처음인 역에서 무작정 내리는 것이다. 처음인 동네를 산책하며 우연히 마주친 길고양이와 마치 영원히 함께 할 것처럼 놀다가, 눈에 띈 예쁜 카페로 훌쩍 들어가 얼음이 꽉 찬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며 달콤한 조각 케이크를 포크로 조금씩 잘라먹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라도 한다는 듯.
그러면서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이제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적어도 예전처럼 날 선 말들을 주고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오래 전의 감정으로 잠깐이나마 돌아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좋은 이별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전화가 왔다. 아내다.
“애들이랑 놀이터 왔어. 놀다 가고 싶대.”
나를 봤을까.
“와이프?”
전화를 끊자 그녀가 물었다.
“놀이터에서 기다린대.”
“가 봐. 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들이 회오리 감잔지 뭔지가 먹고 싶대서 사 갖고 먼저 차로 가 있겠다고 했어, 남편이.”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아서 번호라도 교환해야 하나 머뭇거리는데 마치 내 속내를 읽은 듯 그녀가 말을 잇는다.
“살다 보면 이렇게 또 만나지기도 하겠지.”
“편지, 기억하지?”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어쩌면 기적처럼 찾아온,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더 나쁜 결말에 이르게 되어도 하는 수 없었다.
“편지? 무슨 편지?”
“군대 가서, 너한테 편지 썼잖아.”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랬어? 왜? 중요한 편지였어?”
“중요하다기보다는… 아무튼 미안했다.”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내가 더 미안하지.”
“네가 왜?”
“아니야. 그냥, 널 다시 만나게 되면 말하고 싶었는데 그날이 오늘이 될 줄은 몰랐네.”
그녀는 전부 다 말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굳이 진실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악수했다. 그녀와 어색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나는 혹시 꿈속의 꿈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꿈이었을까, 모든 꿈에서 깨고 나면 뒤척이는 아들에게 팔꿈치로 얼굴을 맞고, 굴러다니는 딸에게 발로 배를 가격당해 화들짝 잠이 깨는, 빛바랜 줄무늬 벽지가 나달거리는 좁은 방이 아닐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녀가 사라지자 다시금 뽕짝이 들려왔고 왠지 가사가 선명하게 들려와 하릴없이 귀를 기울이는데 어쩐지 백일몽을 꾼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