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호랑이 (5/5)

by 걍마늘

아이들은 배 모양 미끄럼틀에서 항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들은 선장처럼 뱃머리에서 소리치고, 딸은 항해사처럼 분주히 배 안을 오간다.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녀석들이 웬일로 한마음 한뜻이 됐다.

벤치에 앉은 아내는 마치 구명정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는 구조대 같다. 물에 빠지면 바로 달려갈 태세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가 구할 수 있을까.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할 능력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조용히 아내 곁으로 가 앉았다. 아내는 시름에 잠긴 듯 말이 없다.

“우린 왜 청새치를 잡겠다고 바다로 나갔을까? 어차피 뼈만 남을 텐데. 통조림을 먹어도 되잖아.”

편의점에서 산 캔 커피를 건넸다.

“사랑을 글로 배워서 그래.”

아내의 결론.

“아빠다!”

나를 발견한 딸이 미끄럼틀에서 내려온다. 아들도 바로 따라왔다.

“물! 물!”

아내가 가방에서 물통을 꺼냈다. 덥고 건조한 날씨다. 한여름 햇살이 그대로 미끄럼틀 위로 떨어졌다. 나무 그늘은 벤치까지 만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아들, 넌 꿈이 뭐냐.”

“꿈?”

“스파이더맨?”

“에이, 그런 게 무슨 꿈이야.”

아들은 물을 마시며 곰곰이 생각한다.

“아빠랑 엄마랑 행복하게 잘 사는 거?”

이놈 봐라.

“행복이 뭔지나 아냐.”

“기분 좋은 거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언제 이렇게 컸냐. 그럼, 딸은? 우리 딸은 꿈이 뭐야?”

“부엉이 인형.”

“부엉이… 인형? 그게 꿈이야? 집에 인형 많잖아.”

“부엉이가 없어. 부엉이만 있으면 완벽할 것 같아.”

물을 다 마신 아이들은 곧장 미끄럼틀로 돌아갔다. 아이들에게 시간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가능성 또한 무한했다.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부러웠다.

“꿈이, 혹시 우주인이었어?” 아내에게 물었다.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어.”

아내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처음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나 싶었다. 느닷없이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분양 공고를 봤을 땐 분명 육십몇 층짜리 주상복합이었거든.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까 십 층도 안 돼 보이는 거야. 이상했지만 일단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지. 사람이 꽤 있었어. 엘리베이터는 바로 도착했고 우리는 멍하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어.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보니 그곳은 엘리베이터라기보다는, 수조 같았다고 해야 할까. 바닥을 제외한 모든 면이 유리로 되어 있었어. 천장까지 전부. 유니폼을 입은 안내원까지 있었지. 사람들이 모두 오르자 부드럽게 문이 닫혔고 안내원이 숫자 버튼을 누르자 덜컹거리며 움직였어. 목적지는 11층이었지.”

나는 아내가 들려주는 꿈을 머릿속으로 그려 나갔다.

지상으로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쇼핑몰의 중심을 관통하는 거대한 기둥을 따라 360도로 나선을 그리며 상승하고,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정육면체 공간은 휘황찬란한 건물 내부를 구경하기에 제격이다. 세련된 내부 장식과 청결한 통로와 반짝거리는 가게들이 눈길을 끈다. 이윽고 건물을 벗어난 엘리베이터는 모노레일처럼 허공에 놓인 레일을 타고 계속해서 어디론가 이동하는데, 아직 눈이 녹지 않은 희끗희끗한 산과, 빨간 불빛과 노란 불빛이 일렬로 늘어선 고속도로와, 막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베드타운의 저녁 풍경이 쓸쓸하면서도 운치 있게 다가온다. 계절은 겨울이다.

“알고 보니 주거지구와 상업지구가 떨어져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였어. 희한하지. 그런 아파트가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꿈속에서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어.”

“나쁘지 않네.”

마침내 단지 안으로 들어선 엘리베이터가 잘 가꾸어진 정원 한구석에 멈추어 선다. 내려보니 엘리베이터가 꼭 온실 같다.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흩어진 사람들은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은 너무 다른데 두 색이 맞닿은 경계는 딱 중간이라 어느 색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바람이 온화하게 정원을 가로지른다. 그곳은 진짜 현실과, 꿈속의 현실이라든가 환각 사이의 경계처럼 모호하다. 눈 밟는 소리와, 바람에 풀과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파트 건물은 아직 잠이 깨지 않은 거인 같다. 바람 부는 들판에 늘어선 모아이 석상들처럼 서서 묵묵히 석양을 향해 있다. 구릉 위로 올라서자 저 멀리 다른 행성의 표면 같은 광활한 갯벌과 아득히 물결치는 바다가 보인다.

“세상엔 우리 둘 뿐이고 아름다운 풍경은 온전히 우리 차지였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지.”

바다가 해를 삼키자 잔상처럼 고요가 남는다. 해가 졌을 뿐인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전부 사라진 기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해는 졌지만 아직 밤은 아니다. 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우리 편일지 우리를 해칠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어둑한 풍경을 응시한다.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지구는 둥글고, 태양은 지구 저편에서 여전히 뜨겁게 빛난다. 나는 아내의 꿈속에서 아내를 바라보며 어두운 자작나무 숲을 어슬렁거리는 밤의 호랑이를 떠올렸다. 호랑이는 눈에 도깨비불을 켜고 은밀히 물가로 내려가, 뜨거운 혀로 얼음장 같은 냇물을 핥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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