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익스프레스 (6/6)

by 걍마늘

남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로 호텔비를 계산했다. 나는 프런트맨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신경 쓰여 애인처럼 그의 팔짱을 꼈다. 그러나 진짜 애인은 아니었으므로 매우 어색했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팔짱을 풀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조용한 복도를 그와 세 걸음쯤 떨어져서 걸었다.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새하얀 침대보가 덮인 널찍한 킹사이즈 베드가 우리를 맞이한다. 카드키는 두 개를 받았다. 하나는 현관 벽에 붙은 전원 슬롯에 꽂았고 나머지 하나는 화장대에 올려놓았다. 거울은 깨끗하게 닦여 있고, 베란다 창이 시원하게 뚫려 있어 바깥이 훤히 내다보인다. 날이 아직 환해 모든 것이 적나라하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끝에 앉았다. 남자도 반대편 끝에 털썩하고 앉는다. 생활의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아늑하고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손을 둘 데도 마땅치가 않아 괜히 이불보만 부스럭거린다.

그렇게 침묵의 농도가 짙어질 즈음 남자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뜨겁고 축축한 손으로 거칠게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벗어나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한다. 그만두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온힘을 다해 고개를 틀었다. 벼락같이 내리 꽂히는 입술을 가까스로 피한다. 남자가 우당탕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바지에 다리가 걸려 균형을 잃었다. 바지가 이미 반쯤 내려가 있었다.

욕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문짝에 등을 기대고 서서 가쁜 숨을 고른다. 거울에 비친 내가 엉망이 된 나를 한심하게 바라본다.

물에 빠졌을 때가 생각났다. 발을 헛디뎠는지 누가 밀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죽고 싶었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물속에서 반갑게 나를 부르던 목소리는 돋을새김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느끼는 공포와, 삶을 놓아버린 순간에 찾아오는 평화가 공존하는 공동이다.

그때 현실 세계로 나를 끌어올린 빛은 다름 아닌 A다. 눈을 감자 숨이 바닥난 숨통을 틔운 부드러운 입술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났다. 문짝에 귀를 갖다 댔다. 초인종 소리다. 그런데 초인종을 누르는 누군가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왜인지 밖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욕실을 나왔다.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흐트러진 침대 위에 루이뷔통 지갑만 덩그마니 놓였다. 지갑 속을 확인했다. 폴라로이드 사진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는 그대로 있다. 남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도망치다가 뒤늦게 지갑을 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카드키도 그대로 있었다. 돌아올 생각이 있었다면 카드키를 가지고 나갔을 것이다. 남자는 내가 원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거부감이 예상외로 컸을 뿐이다. 이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 보았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는데 철커덕하고 문손잡이가 먼저 돌아간다. 복도에서 문을 연 사람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아니었다. 상대방도 당황했다. 재빨리 문을 닫으려 했으나 버티는 힘이 훨씬 셌다.

“누구세요! 누군데 맘대로 문을 여는 거예요!”

나는 문을 사이에 두고 그와 대치했다.

“다행이네요. 사고가 난 줄 알았습니다.”

“사고요?”

“카드로 결제하셨죠?”

문 뒤에서 누가 말했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확인할 게 있습니다.”

“인터폰으로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했어야죠. 확인도 안 하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온다고요? 그쪽을 어떻게 믿죠?”

당기는 힘이 더 강해졌다. 나머지 하나가 더 붙었다. 문틈이 점점 크게 벌어진다. 역부족이다.

“어이쿠, 지갑이 떨어졌네.”

문틈으로 파란 손이 쑥 들어왔다. 깜짝 놀라 문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한계치였다. 어차피 더 버틸 힘도 없었다.

“어디 보자….”

후줄근한 카키색 잠바를 걸친 단단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지갑을 뒤적거린다. 문을 연 사람은 호텔 직원이었다. 명찰을 달았다. 멀끔하게 생긴 젊고 키 큰 남자다. 따로 놓고 보면 인상적이지 않은데 나란히 선 모습을 보니 의외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이 카드로 결제하셨죠?”

카키색 잠바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들어 보였다. 카드를 뺏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실패한다. 둔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몸놀림이 재빠르다.

“경찰을 불러야겠어요.”

그러자 호텔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카키색 잠바를 돌아봤다.

“제가 경찰입니다만.”

카키색 잠바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신분증 같았다. 사복 경찰을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지러 가려다가 말았다.

“경찰이 왜…?”

“카드 도용 신고가 들어와서요. 서까지 가 주셔야겠습니다. 남의 카드를 함부로 쓰면 되겠습니까. 그것도 이런 카드를.”

“훔친, 카드라고요?”

“자백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 카드는 제가 쓴 게 아니라서. 아! 지갑에 폴라로이드 사진 있죠? 지갑을 갖고 계셨던 남자분의 딸이라고 했어요. 주민등록상 부모는 아니고 생물학적인…. 뒷면에 전화번호가 있는데, 여자아이 번호라고 했나 엄마 번호라고 했나….”

기억이 안 났다. 누구라고 했지? 혼란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골탕을 먹일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잘못이 있었나.

카키색 잠바가 사진 뒤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경찰인데요, 사진 뒤에 번호가… 아, 따님이시라고요. 네….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떨어뜨린 것 같다. 당시엔 잃어버린 걸 몰랐다. 오후에 결제 문자를 받고 나서야 알았다….”

“저기 잠시만.”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저한테 왜….” 그에게 따져 물으려는데 “누구시죠?”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당혹스럽게도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경찰은 분명 사진 뒤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진실을 말했다면 전화를 받은 여자는 소녀의 엄마일 것이다. 그러나 거짓이라면, 그러니까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은 여자고, 남자는 나보다 먼저 지갑을 주운 사람이거나 내가 주운 지갑을 건네받은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여자는 소녀의 엄마가 맞지만 지갑의 주인은 남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착각한 것이다. 어쩌면 전부 다 남자가 지어낸 이야기였는지도 몰랐다. 제우스의 장난에 놀아난 기분이었다.

카키색 잠바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남자의 이름조차 모르는데.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지갑은 내가 그를 만났음을 증명하지만 실제로 그를 만났다는 증거는 되지 못했다.

가방에서 내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마지막 통화는 남편이고, 휴대폰을 꺼둔 사이에 온 전화는 없다. 남편의 번호 밑에 A의 번호가 있다. 애타게 나의 안위를 묻던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아빠는 사랑을 사탕처럼 달고 살았다. 나는 생각했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세상에 없는 거나 다름없다고. 그 사랑은 달콤하고 살살 녹는 것이 아니라 끈적하고 금방 더러워지는 것이었다. 개미 같은 벌레들로 새까맣게 뒤덮인,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생각한다. 그 또한 사랑일지 모르겠다고. 사랑이라는 말은 제각각의 사랑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거라고. 누군가에게 사랑은 욕망이고 누군가에게는 희생이며 누군가에게는 이해고 누군가에게는 걱정이며 누군가에게는 책임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뜻하는 하나의 낱말이 바로 사랑이었다. A에게 그것은 두근거림이었으며 남편 또한 마침내 그것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통화 목록을 위아래로 넘겨보다 A의 번호를 눌렀다. A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