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만난 소설로부터

저주받은 늪의 비밀

by 걍마늘

나는 내가 읽은 첫 소설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여덟 살이었고, 요즘으로 치면 일공일삼 아동문학쯤 될 것 같은데, 막 한글을 뗐을 무렵이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끝까지 읽었고, 정말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을 만큼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은 것이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긴 기억이 선명하다. 그것은 피터팬, 헨젤과 그레텔, 불쌍한 꼬마 한스 같은 어린이명작동화가 아니라,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나오는 진짜 소설이었다.

나는 아직 그 책을 갖고 있다. 첫 소설을 명확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라면서 몇 번이나 버려질 계기가 있었지만 끝까지 지켜냈다. 책장 한편엔 늘 그 책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도 이 소설을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설렌다.

내 손에 책이 들어온 날의 기억 또한 선명하다. 담임선생님이 한번 읽어 보라고 준 책이었는데 왜 나한테 그 책을 주었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짐작컨대 다른 아이들보다 한글을 조금 일찍 뗀 덕분일까 싶기는 한데, 선생님도 그때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그 책이 여덟 살 꼬마의 인생을 어디까지 데려갈지는.

선생님은 아마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때도 이미 나이가 있으셨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책은 자녀분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혹시 아이가 커서 버리려던 책을? 물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어쨌거나 선생님이 일으킨 나비의 날갯짓은, (어쩌다 보니) 소설에 인생을 (3분의 1쯤) 바친 어리석은 한 인간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지금의 나를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드실지 궁금하다. "에휴, 너 그렇게 살 줄 알았으면 그 책 안 주는 건데." 하셨을까.

그렇지만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됐어요. 선생님 덕분에 인생이 지루할 틈이 없었답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필리스 휘트니(Phyllis A. Whitney)'의 <저주받은 늪의 비밀(Mystery of The Haunted Pool)>이다. 검색해 보니 내가 가진 것과 다른 판본들이 보이는데, 내가 갖고 있는 판본은 1976년 1월 1일에 발행한 육영사 판이다. 당연히 지금은 절판되었다. 온라인 중고서점에서는 내 것과 똑같은 판본을 5,500원에 팔고 있었다. (배송비가 2,700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 또한 이전 화에 쓴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각인된 첫사랑 같은 걸까.

오해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여기서 내가 말하는 첫사랑의 대상은 '소설'이다. 첫사랑이 나오는 소설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저주받은 늪의 비밀>에 등장하는 소녀와 소년도 우정 비슷한 감정까지만 나눈다. 이야기가 더 길었다면 분명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첫사랑이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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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이 조금 아쉬워 원문을 함께 올립니다.


수잔 프라이스는 뉴욕에 사는 열세 살 소녀다. 수잔의 가족은 아버지의 병과 돈 문제로 아버지의 고향인 하일랜드크로싱으로 이사해야 할 처지에 놓이는데, 세 들어 살 집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잔이 이사 한 달 전에 먼저 하일랜드크로싱으로 간다. 세 놓기를 망설여하는 집주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말한다.

"하일랜드크로싱에서 집을 세내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너무 낙심은 말아라. 수잔, 너도 이제 나이 열세 살이니까 말이다. 그만한 나이가 되면 이 세상에는 좋은 일만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Thinking of Dad took a little of the joy out of the day. When she had said good-bye to him at the hospital yesterday, he had told her he wanted her to be cheerful no matter how things turned out "In a few months you'll be in your teens," he said, "and growing up means learning to take the bad times in your stride, along with the good."

세상에, 그때는 열세 살이 그 정도의 나이였나 보다.

구글 지도를 띄우고 하일랜드크로싱이 어딘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그런 지명은 없다. 단서는 첫 문장에 있었다.

"냉방 장치가 되어 있는 장거리 버스는, 8월의 무더운 뉴욕을 떠나자 허드슨강의 서쪽 강가를 따라 줄곧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허드슨강의 서쪽 강가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하일랜드라는 지명이 나온다. 뉴욕 주 하일랜드다. 그렇다면 하일랜드 어딘가의 교차로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나라로 치면 하일랜드 삼거리 정도가 되려나.

그곳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덥기는 해도 습기가 없기 때문에 한결 개운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버스가 골짜기 위를 크게 돌아가자, 아득한 아래쪽에 허드슨강이 8월의 파란 하늘을 반사하여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강의 폭이 좁아지고 꾸불꾸불해졌네. 그리고 양쪽의 강언덕이 높아진 것을 보니 이제 거의 다 왔나 봐…."
THE AIR-COOLED BUS had followed the west bank of the Hudson River all the way from New York City, and Susan Price had loved every minute of this journey she was taking by herself. Without four brothers along, things seemed very peaceful. The city had been hot and damp and gray, but here the sun was shining, and when the highway curved above the river she could glimpse blue water far below, reflecting the sky of this late afternoon in August.

버스에서 내린 수잔의 눈에 보인 하일랜드크로싱은 이렇다.


내린 것은 수잔뿐이었다. 수잔은 정류장에 선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 데도 읍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운전수의 말을 잘못 들은 걸까? 틀림없이 하일랜드크로싱이라고 한 것 같은데…."

약간 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넓은 도로 저편 아득히 떨어진 곳에 정사각형 탑이 있는 조그만 2층 건물이 눈에 띄었다. 마치 국민학교 교사의 모형과도 같았다.


이윽고 수잔은 고모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상기한다.


'볼 일이 있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버스가 다니는 넓은 길을 따라 되돌아오너라. 그러면 곧 이전에는 공회당이었던 낡은 건물이 눈에 띌 거다. 나는 지금 그 집을 빌어서 가게를 내고 있단다.'

큼직한 떡갈나무가 마치 도로를 덮을 듯 무성한 가지를 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잔은 편지에 쓰인 대로 넓은 길을 따라 버스가 온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곧 편지에 쓰인 대로 낡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전에는 공회당이었다고 하니만큼 물론 큰 건물이다. 네모진 새하얀 건물로 지붕 한가운데에 네모진 탑이 솟아 있다.

현관 위쪽에 간판이 달려 있고, 그 간판에는 크고 분명한 글씨로, '떡갈나무 골동품점'이라 쓰여 있다. 고모의 가게였던 것이다.


Susan stood for a moment in the dirt path along the edge of the paved road, looking up and down uncertainly. Hills rose before her and cut down in a curving line at either side as if they swallowed the highway, and there was no river in sight. Had there been a mistake of some sort? Had she only imagined that the driver had called her stop? There seemed to be no town, but only a gas station a few yards down the road, then along stretch of lake on this side. Across the highway was a small building with a square white tower topped by some sort of curious red pyramid arrangement. It looked as if it might be a miniature school But that was all, and there was no Aunt Edith in sight.
Remembering her instructions, Susan began to retrace her steps away from the lake. "If I'm not at the bus stop to meet you," Aunt Edith had written, "just walk back a little way along the road and you'll see the old town hall that is now my shop."
A gigantic oak tree with spreading branches arched above the highway, and as Susan moved toward it the building she was looking for came unmistakably into view. It was big and square and white, with a bracketed roof and a small square tower rising center front. An old-fashioned fan light graced the front door, and on either side of the door were leaded windows that ran almost from baseboard to roof. Just under the eaves was a sign that read "Old Oak Antique Shop" in large, clear letters.

고모는 하일랜드크로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여름철에 피서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고장이란다. 그런 사람들의 별장이 언덕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읍은 이쪽에 있는데 숲에 가려서 길에서는 보이지 않아."

Aunt Edith laughed as she reached for Susan's suitcase. "I suppose we're hardly more than a village, with the highway running through like Main Street. It's the summer people that keep us going, and their houses and cottages are in the woods up and down the hill. On this side, back of the lake, you'll find quite a settlement, but the trees are so thick you can't see much from the highway.

여름. 강. 골동품. 오래된 저택. 울창한 숲. 불길한 늪. 그리고 소년, 소녀. 완벽하다.

소년의 이름은 진. 수잔의 가족이 세 들어 살려는 집의 주인인 캡틴 댄 티그 씨의 손자다. 진은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 할아버지가 병원비로 가진 돈을 다 써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세를 놓고 집을 떠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렸을 때부터 살아온 집에서 나가게 된 것이 전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 진은 수잔의 가족이 오지 않길 바란다. 수잔은 결국 진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큰 줄기는 늪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과정이지만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이란 이처럼 메인 스토리(행위)와 서브 스토리(감정)가 절묘하게 이중 나선을 그리는 소설이다. 소설은 구조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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