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킹 게임
딸아이 등굣길에, 잊고 간 서류가 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단지 입구에서 턴하여 지하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잠옷 바람에 패딩 코트만 걸치고 나온 아내. 오늘 날씨 좋더라, 하며 차에 올라탄 김에 다 함께 등굣길에 올랐다. 딸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날씨가 너무 아까워 바다나 보러 갈까, 했더니 그러자고 해 바로 차를 돌려 이십여 분 거리의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마침 만조가 막 지났을 무렵이라 물도 많고 바다 색깔도 파랗고 바람도 없고 햇살도 더없이 맑아 가히 선물과도 같은 아침이었다. 해변은 한산했다. 맨발로 갯벌을 걷는 사람들 몇이 전부였다. 갈매기들은 갯벌에 한 발로 서서 조용히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천연기념물이라는 저어새도 보았다. 저어새는 주걱처럼 생긴 부리로 부지런히 갯벌을 휘젓고 다녔다.
“누가 우릴 보면 불륜 커플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말했다.
“해장하러 나온?”
아내는 곧바로 나의 상상을 발전시킨다.
“모텔을 나서기엔 조금 이른 시간 아냐?”
“늙었잖아. 잠이 없는 거지.”
“그러게 낯선 데선 잠도 잘 못 잘 거야.”
“우린 뭘 먹었을까? 조개구이에 소주?”
“뭔 쇼비뇽 같은 건 아니겠지. ”
“그런데 잠옷 차림으로 모텔을 가지는 않지 않을까?”
“재밌잖아. 잠옷을 입고 모텔로 자러 가는 거지.”
“잠옷 차림으로 조개구이집에서 소주도 한 잔 하고?”
“좋네. 소설로 한번 써 봐야겠다…” 하는데 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밀란 쿤데라의 <히치하이킹 게임>이다. 여행 중인 커플이 서로를 처음 만난 사람들로 설정하고 마치 게임을 하듯 역할극을 하다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다.
그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오늘 운이 좋은데요. 운전한 지 오 년 동안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히치하이킹해서 제 차에 탄 적이 없었거든요.”
아가씨는 남자 친구의 찬사마다 모두 감사하다는 말로 인사했다. 그 열기를 좀 더 붙들어 두기 위해 그녀는 말했다.
“거짓말 참 잘하시네요.”
“제가 거짓말쟁이같아 보이나요?”
“여자들한테 거짓말하는 걸 아주 좋아하는 것같아 보여요.” 이 말 속에는 그녀도 모르게 오랜 불안이 약간 스며들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정말로 남자 친구가 여자들한테 거짓말하기를 좋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는 여자 친구가 질투를 하기 시작하면 바로 화를 내곤 했는데 그날은 자기가 아니라 모르는 운전자에게 그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기가 쉬웠다. 그는 그저 평범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게 거북하신가요?”
“제가 당신 애인이라면 거북할 것 같은데요.” 이 말은 청년을 향한 교묘한 권고였다. 하지만 나중에 한 말은 낯선 운전자만을 향한 것이었다. “저는 당신을 모르니까 거북하지 않아요.”
“여자들은 늘 남자 친구보다 낯선 남자를 더 잘 용서해 주지요.” (이번에는 그가 아가씨에게 하는 교묘한 권고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니 잘 통할 겁니다.”
그녀는 이 말 속에 함축된 교육적 뉘앙스를 알아차리지 못한 척했고 이제는 모르는 운전자에게만 말을 하기로 작정했다. “몇 분 후면 헤어질 텐데 그게 우리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요?”
“왜요?” 그가 물었다.
“제가 비스트리카에서 내릴 거라는 거 아시잖아요.”
“제가 당신하고 같이 내리면요?”
이 말에 그녀는 눈을 들어 청년을 보았고, 질투에 가슴이 찢어질 때 자기가 상상했던 그대로임을 확인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히치하이킹하는 모르는 여자에게) 그렇게 추파를 던지고 그것이 그를 몹시 매혹적으로 만든다는 것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그래서 도발적으로 무례하게 받아쳤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한데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어떻게 할 건지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정중하게 말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의 말은 히치하이킹하는 인물보다는 아가씨에게 훨씬 많이 향해 있었다.
이렇게 여자에게 살랑거리는 말을 들으니 그녀는 현행범으로 그를 잡은 것 같았고 교묘한 책략으로 고백을 끌어낸 것 같았다. 그녀는 순간 갑작스러운 분노가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본인이 바라는 게 현실인 줄 아시나 봐요!”
그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아가씨의 고집스러운 얼굴이 경련이 일었다. 그는 그녀에게 묘한 연민을 느꼈고, 평소 그녀의 익숙한 (그가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다 말하는) 눈길을 되찾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어깨를 감싸 안고서 이 게임을 그만하려고 부드럽게 그녀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빼내며 말했다. “좀 빠르시네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거절을 당한 그가 말했다. 그다음 그는 아무 말 없이 앞의 도로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점점 역할에 몰입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정말로 맞나 의심하게 된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애초의 매력이 이제는 불안 요소가 되는 것이다. 급기야는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헷갈리다가 종국에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되고 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청년은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와 침대 위에 늘어진 긴 줄을 잡아당겼다. 불이 꺼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원래 관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녀 옆에 누워, 그녀의 몸과 조금이라도 닿지 않으려고 피하고 있었다.
잠시 후 숨죽은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머뭇머뭇하며 어린 아이 같은 몸짓으로 아가씨 손이 그의 손을 살짝 건드렸는데, 스쳤다가 뒤로 뺐다가 다시 스쳤다가 하더니, 흐느낌 소리로 중간중간 끊어지며 애원하는 목소리가 “나는 나야, 나는 나야….”라고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모르는 것을 똑같이 모르는 것으로 정의하는 여자 친구의 말이 얼마나 서글프게 말이 안 되는지 너무나 잘 이해했다.
흐느낌은 긴 울음으로 이어졌다. 아가씨는 그러고도 한참 그 가슴 저미는 동어반복을 계속했다. “나는 나야, 나는 나야, 나는 나야….”
그래서 그는 아가씨를 달래기 위해 연민에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 감정을 가까이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에 먼 데서 불러들여야 했다.) 그들에게는 아직 십삼 일의 휴가가 더 남아 있었다.
소설의 진정한 서늘함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 관계는 이미 파탄이 나 버렸는데 함께 가야 하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은 것이다. 아이러니한 운명이다. 관계의 진짜 문제는 끊어질 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야 할 때 생긴다. 이처럼 문장 하나가 소설 전체를 다른 층위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단 한 문장으로 개인의 사건을 인생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문장이 마법을 부리는 순간이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