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물 위로 (3/5)

by 걍마늘

나에게 죽음은 늘 질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때로 숨을 참고 죽음을 상상한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드는 날이면 죽음도 그렇게 오겠지 생각했다.

어느 날은 산 채로 매장당하는 상상을 했다. 가위눌린 것처럼 의식은 또렷한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몸 위로 흙이 쏟아져 내린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입도 열리지 않아 생존을 알릴 길이 없는데 마구 콧구멍을 틀어막는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다.

안치실에서 갑자기 의식이 돌아오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눈을 떠 보니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이 좁고 추운 냉장고 안이다. 산소는 바닥나기 직전인데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우주 공간처럼 산소도 중력도 위아래도 앞뒤도 없는 무한한 어둠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상상을 해 본 적도 있다. 우주선에 구멍이 뚫리고, 진공청소기로 빨려 들어가는 쓰레기처럼 그 안으로 빨려 드는 것이다. 그리고 안녕, 영원히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우주의 기나긴 역사 속으로 입김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지 못한, 원피스 다음 시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몽키 디 루피를 닮은 친구는 어땠을까. 숨이 먼저 막혔을까 정신을 먼저 잃었을까.

4월 16일이었다. 그날의 술자리는 막차 시간이 지나서까지 계속되었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셋이다. 취직 턱을 내기로 한 그날의 주인공과 술이 술을 먹어 공연히 술에 떡이 된 친구, 그리고 딱히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끝까지 버틴 멀쩡한 나.

술에 떡이 된 친구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야, 너는 그 새끼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야. 정신 차려. 결국 시간 낭비고, 인생 낭비라고. 남의 돈 먹기가 쉬운 줄 아냐. 부모가 겁나게 돈이 많아도, 겁나게 특출한 재능을 타고났어도, 운이 겁나게 좋아도 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는 못 살아. 그러고는 이미 만취해 테이블에 코를 박고 잠든 그날의 주인공과 똑같은 자세로 고꾸라졌다.

테이블 양쪽에서 먹다 만 부대찌개를 사이에 두고 엎드린 두 친구의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정신이 말짱한 내가 뒷정리를 해야 했으므로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다 취직한 친구의 품에서 지갑을 꺼내 술값을 계산했다. 오만 원짜리 지폐가 보여 택시비도 챙겨갈까 하다가 그러면 진짜로 최악이 될 것 같아 조용히 술집을 나왔다.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쉬는 날이었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한때는 간이며 쓸개며 다 내줄 듯 굴던 친구들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리고 여전히 사춘기 소년처럼 방황하는 나를 위한 애정 어린 조언이겠지만, 앞으로 현실 친구들을 만날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최근 몇 년은 아포칼립스에 꽂혀 있었다. 원전 사고로 방사능이 누출돼 황폐화한 지구를 배경으로, 그로 인해 발생한 괴생물체들과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가 생존을 위해 격돌한다는 설정이다. 인간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괴생물체를 활용할 방법을 찾아냈고 괴생물체들 역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류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나는 몬스터 편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배척하지 않고 흔쾌히 동족으로 받아들여 줄 것만 같았다. 나는 생존 욕구만 남은 그들의 차가운 눈빛 속에서 스스로 봉인한 슬픔을 보았다. 적어도 내가 그린 몬스터들은 그런 존재였다. 공모전은 끝났고, 내가 창조한 세계는 또다시 긴 동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난간 위로 환하게 자살 방지 문구가 떠올랐다. “생각도 너무 많으면 안 좋아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까요.”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서 천천히 걸으며 계속해서 문구를 읽어 나갔다. “많이 힘들었어요?” “바람 참 좋지 않아요?” “기분이 꿀꿀할 땐 기지개 한 번 켜고 하늘을 봐요.” “힘든 일들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생각보다 별이 많이 보이는 밤이었다. 바람도 좋았다.

“3년 전에 걱정한 거 기억나나요?” “1년 전 걱정은요?” “6개월, 그 걱정은요?” “지금 그 걱정도 곧 그렇게 될 거예요.”

나는 도시의 불빛을 반사하며 일렁이는 검은 강물을 바라보다 난간의 문장들은 누군가의 죽을 결심을 돌이키기 위한 위로임을 상기했다.

“오늘은 추억이 될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의 손을 쓰다듬으며 들려주겠죠.” “누구보다 용감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당신의 인생을.”

죽을 결심을 한 누군가는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대체 어느 정도의 마음이어야 아무런 미련조차 남지 않게 되는 걸까.

나는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죽음을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진짜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걸까. 매번 도망치고 숨고 포기해 온 나에게는 그 정도의 마음을 헤아릴 만한 깜냥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보행로 한복판에 놓인 구두 한 켤레가 보였다. 앞코가 강 쪽을 향하게 가지런히 벗어놓은, 구겨짐은 선명하나 반짝반짝하게 잘 닦인 검은색 남자 구두였다.

한강을 감상하다 구두만 남겨두고 증발해 버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경찰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목격자가 없거나 뛰어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난간에 바싹 붙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깊은 밤인데다 교각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확실치는 않았으나 거품 같은 것이 일었다 사라진 듯했다. 정말로 누가 떨어졌다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랐다.

휴대폰 손전등 앱을 켰다. 난간 밖으로 최대한 몸을 내밀고 아래쪽으로 불빛을 비추어보았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잡아끌었고 이길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어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채로 한동안 구두 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한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블랙아웃이 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추락하는 꿈은 키 크는 꿈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이제 잠이 깨면 옥탑방이 아니라 부모님과 살았던 시절의 넓고 깨끗한 내 방이고, 거울에 비친 나는 열다섯 살 소년.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 공부도 꿈도 사랑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어. 만화가가 되고 싶었으니까 진심으로 노력할 수도 있을 거야. 수줍어 말조차 걸지 못한 여자애한테 고백을 할 수도 있겠지.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젤리처럼 쫀득하고 푹신한 것이 부드럽게 몸을 감싼다. 너그러운 어머니의 손길 같기도 하고 믿음직한 아버지의 등짝 같기도 한 그것은 이내 트램펄린처럼 나를 튕겨냈고 나는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금 철썩하고 그 위로 떨어졌다. 함성 같은 빗소리가 다시 들렸다. 분명 물 위로 떨어졌을 텐데 몸이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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