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물 위로 (4/5)

by 걍마늘

번개가 어둠을 쪼갰다. 천둥이 허공을 찢는다. 여전히 장대비가 퍼붓고, 물탱크는 아직 옥상 난간에 걸려 있다. 무지개 우산은 돛 없는 배처럼 옥상을 표류한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에게만 이 세계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물을 짚고 일어섰다. 넘어지지 않게 물이 나를 지지해 주는 느낌이었다.

진작 이런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십 년 전이었다면, 내가 그 배를 탔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강에 투신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익수 사고 현장이나 수해 현장에서 특수 요원으로 활동했을지도 모르고,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거나 사이비 교주가 되어 신의 아들 행세를 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물에 빠지지 않는 능력이란 곧 물에 빠져야만 알 수 있는 능력이다. 나에게 물에 들어가기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과 같은 불가피한 참사가 아니었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나빴다고 해야 할까.

꿈인지 생신지 기적인지 각성인지 아직은 확실치가 않아서 신의 아들처럼 물 위를 걸어 보았다. 혹시나 포도주로 바뀔까 손으로 물을 떠 맛을 보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갈라져라!’ 외치며 손을 뻗어 보기도 했다.

다시 우산을 썼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이 온통 물, 일렁이는 검은 물뿐이다. 물에 가라앉지 않을 뿐 특별한 변화는 없다.

털북숭이는 어떻게 됐을까. 물에 빠져 죽었을까. 물탱크를 옥상 밖으로 끌어내린다. 반쪽짜리 물탱크는 이제 구명정이 되었다.

번개가 치기를 기다린다. 편의점은 큰길 쪽, 교회 첨탑이 솟은 상가 맞은편이다. 편의점은 일 층이었다. 제때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러나 기지를 발휘해 에어포켓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살아남아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번개가 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위치를 확인한다. 골목은 사라지고, 그 위로 거대한 강이 흐른다. 늘 혼자인 기분이지만 실제로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세상은 나를 원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세상에 나만 남고 싶진 않았다.

아포칼립스 소년이 몬스터 편에 서게 된 것은 몬스터 무리를 이끄는 한 인간 소녀 때문이었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인간이 저기 있지?

소녀는 전신을 감싸는 괴상하게 생긴 탈을 뒤집어쓰고 몬스터들과 함께 인간과 싸웠다. <모노노케 히메>의 산처럼, <아바타>의 제이크 설리처럼. 몬스터를 사냥하는 인간들이 몬스터보다 더 괴물처럼 느껴진 것은 몬스터가 원래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멸시하고, 심지어 절멸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기습으로 위기에 처한 소녀를 구한 소년은….

시끄러운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털북숭이다. 털북숭이가 틀림없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 나는 부지런히 헤드 랜턴을 서치라이트처럼 비추며 어디서 소리가 들려오는지 찾았다.

털북숭이는 덜 잠긴 건물 외부 계단의 캐노피 차양에 고립되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짖는 소리가 더 높아진다. 나도 개처럼 짖어 화답했다.

물탱크를 끌고 개를 향해 달려갔다. 차양 위로 올라가 내 개인 양 끌어안았다. 개도 반가운지 혀를 길게 빼물고 헥헥 소리를 내며 철썩철썩 꼬리를 흔든다. 젖은 마포걸레 같은 털을 쓰다듬자 검은 구슬 같은 눈동자가 또르르 구른다. 벌써 정이 들었다.

개를 번쩍 들어 물탱크 방주에 태웠다. 개는 순순히 자신을 내 손에 맡겼다. 나는 개를 데리고 마침내 큰길로 나섰다.

편의점은 이미 완전히 물에 잠겼다. 물은 뿌옇게 흐리다. 흙탕물이라 물속이 보이지 않는다. 물에 잠기지 않은 것은 교회 첨탑뿐이다. 물속으로 들어가 확인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보이는데 이제는 반대로 잠수가 어려워졌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주위를 돌아보는데 개가 하울링을 한다. 소리가 하도 괴상해 처음에는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절규처럼 들렸다. 괜찮아, 괜찮아하며 아무리 보듬고 쓰다듬어도 소용없었다.

상가 쪽에서 시꺼먼 것이 떠내려 온다. 어쩐지 사람처럼 보이는 불길한 무엇이다. 개가 컥컥거리며 울음을 멈추고 나서야 내내 그쪽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개를 태운 방주를 끌고 그것을 향해 갔다.

편의점 건물에 있는 화장실은 고장이 잦았다. 지은 지 삼십 년이 넘은 무너지기 직전인 건물인데다 건물주도 관심이 없는지 관리를 전혀 안 했다. 화장실이 고장 나면 상가 화장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부랴부랴 출입문을 잠그고 ‘자리 비움’ 팻말을 건 뒤 건널목이 있는 큰길을 건너 상가로 뛰어갔다.

상가 화장실은 아무나 이용하지 못하게 일부러 숨겨놓은 것처럼 미로 같은 통로 끝에 꼭꼭 숨어 있었다. 그마저도 상가가 문을 닫는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교회가 입주한 꼭대기 층 화장실만 열어 놓았다.

상가는 세 동이 나란히 붙은, 가로로 긴 사 층 건물이었다. 한밤중에는 음침한 계단을 굽이굽이 올라가 뒤숭숭하게 일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웬만큼 급하지 않으면 참는 편을 택했다. 근무 시간 전후로 볼일을 보았으면 한다는 점장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생리 현상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그 상가 꼭대기 층 화장실로 피신했었는지도 모른다. 제발. 그것이 그녀가 아니기만을 바라며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맞았다. 헤드 랜턴 불빛을 다른 데로 비추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 죽었을까. 그녀는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 낯이 익다.

이를 악물고 그를 바로 뒤집어 얼굴을 확인한다. 공격적인 매부리코. 무자비한 사각턱. 그 남자다. 그런데 목 부근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다. 꼬챙이 같은 것에 찔린 듯했다. 익사가 아니라 과다출혈로 죽었는지도 몰랐다.

털북숭이가 늑대처럼 앞다리를 펴고 앉아 고개를 쳐들고는 아까처럼 괴상한 소리로, 서글프게 운다. 그 소리는 나를 보고 짖을 때와는 달랐다. 한참을 그러다가 붙잡을 틈도 없이 방주에서 뛰어내린다. 체력을 회복했는지 어디론가 열심히 헤엄쳐간다. 나는 다급히 개를 쫓았다. 우산을 펼쳐 들고서는 어정쩡하게 방주를 잡고 달렸다.

“저기 누가 있다는 거야?”

빗줄기가 들이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릅뜬다. 첨탑 십자가에 정체불명의 검은 실루엣이 있다. 정말로 뭔가 있는 것 같았다. 털북숭이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조금씩 끈기 있게 나아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곳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개의 코에는 약 삼 억 개의 후각 수용체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오백만 개 정도라고 하니 냄새를 맡는 능력이 사람의 60배에 달한다는 소리다. 사람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초능력이 아닌가. 수색견은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시체나 폭발물을 감지하고, 블러드하운드는 십몇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진 부상자를 추적한다. 습도가 높거나 비가 오는 날은 냄새 입자가 더 잘 퍼져서 더 멀리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개가 목숨을 걸고 주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첨탑 밑에 다다른 털북숭이는 앞발을 허우적대며 첨탑을 기어오르려고 애썼다. 그러다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개헤엄을 치며 다시금 그 괴상한 소리로 서글프게 울었다. 우산을 접어 방주 안에 던져 놓고 달려가 털북숭이를 안아 들었다. 가쁘게 뛰는 심장 박동이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부드러운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주변이 잠잠해졌다. 번개는 사라지고, 천둥도 멎었다. 숨소리가 빗소리보다 크게 들려온다. 빗줄기도 가늘어졌다. 물이 호수처럼 잔잔하다. 말간 보름달이, 서서히 걷히는 먹구름 사이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어둠도 조금 옅어진다. 마술처럼 한순간에 다른 세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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