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물 위로 (5/5)

by 걍마늘

십자가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이었을까. 털북숭이의 주인이었을까. 그가 목사로 추정되는 남자를 죽였을까. 털북숭이는 주인의 피 냄새를 맡은 것이다. 위험에 빠진 주인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근거도 없이 그의 편을 들고 있었다.

“당신은… 신인가요?”

첨탑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긴 했지만 이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녀일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먼저 말을 걸어왔음에도 그림자 속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가 맞는지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빛이 모자라다. 목소리에도 그림자가 졌다.

“신은… 아닐 거예요. 신의 아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나는 물을 찰박이며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소금쟁이처럼 물에 떠 있는 기분을, 부력이 중력을 이기는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의 내가 바란 능력은 하늘을 날고 눈으로 레이저 광선을 쏘고 빛보다 빠르게 달리고 산을 통째로 들어 옮기는 따위의 초능력이 아니었다. 그저 잘하고 싶은 일을 잘하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이 개를 구했어요. 그리고, 이 개가 아니었다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겠죠.”

“위로예요, 얘 이름은.”

그녀가 첨탑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달빛에 창백하게 빛난다. 내가 아는 그녀가 맞았다. 거짓말 같았다.

“특이한 이름이네요.”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에 다리가 반쯤 잠긴 그녀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털북숭이를 건넸다. 위로가 반가이 그녀의 얼굴을 핥는다.

“옆집 언니가 키우던 개예요. 위로가 되니까, 위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어요. 선물 받은 개라고 했죠.”

“옆집 언니와 친했나 봐요.”

그녀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할지 생각을 정리한 듯했다.

“엄마 회사에서 일하는 언니였어요. 언니가 일하는 동안 제가 위로와 놀아주었죠. 엄마는 인터넷 방송을 하는 언니들을 관리했어요. 저는 언니들이 사는 방을 관리했고요. 언니는 동화 작가가 꿈이라고 했어요. 플랜더스의 개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인터넷 방송을 하는 거라고 했어요. 저는 언니들이 버는 돈으로 대학을 다닌 거나 마찬가지였는데요. 몰래 다른 사업을 벌이다가 파산한 오빠가 언니들 돈을 빼돌려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결국 언니는 대학을 못 가게 되었죠.”

“오빠요? 혹시 그 언니한테 위로를 선물한 사람이…?”

“돈을 빼돌린 사람은 제 친오빠예요. 오빠가 엄마 일을 도왔거든요. 편의점 일은 언니한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싶어서 하게 됐어요. 공부를 잘했으면 과외도 하고 그랬을 텐데, 큰 도움은 안 됐죠. 언니는 더 세게 방송을 했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이 교회예요. 그러더니 구원을 받았다고 했죠. 위로는 목사가 데려온 유기견이었어요.”

어머니는 입시나 취업 같은 내 인생의 고비 때마다 기도가 노력이라는 듯 매일같이 새벽 기도를 나갔다. 그러나 기도가 통한 적은 없었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능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가 어리석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한다. 밤새 빛나는 십자가처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스물네 시간 잠들지 않는 편의점처럼 위안을 주기도 했으니까.

“언니가 목을 맸어요.”

위로는 얌전히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방을 치우러 들어갔다가 휴대폰 케이블로 화장실 문고리에 목을 매고 죽은 언니를 발견했어요. 유서도 있었죠. 내용은 간단했어요. 미안해. 위로를 부탁해. 다른 말은 없었어요.”

나는 떠내려가는 방주를 낚아채 상가 옥상으로 건너갔다. 도망가지 않게 우산 손잡이를 걸어서 첨탑 사다리에 고정시켜 놓았다. 보이지 않는 쪽에 첨탑을 오르내릴 수 있는 철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밑에, 찰랑이는 물속에, 손에 쥐기 딱 좋은 굵기의, 한쪽 끝이 찌르기 좋게 뾰족한, 젓가락보다 조금 긴 막대기가 굴러다닌다. 부러진 드럼 스틱 같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간 교회에서 키보드, 기타, 그리고 드럼으로 이루어진, 찬송가를 부르는 밴드를 본 적이 있다. 교회 물건이 아닐까 싶었다.

“지구가 멸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섰다. 물에 잠긴 동네는 무섭도록 고요하고 끔찍하게 평화롭다. 아파트 십사 층에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마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시리우스 알파를 누비던, 신림동 반지하에 산다는, 반지하가 헬이냐 옥탑방이 헬이냐 자강두천 하던 EQ84님의 운명은 아무래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성경에 따르면 노아는 일 년여 만에 방주를 나왔다. 두 달가량 내리 비가 내렸고, 비가 그치고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으며, 물이 완전히 마른 것은 그로부터 육 개월쯤 후다. 일찍이 스파이더맨의 삼촌인 벤 파커가 말했듯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지만 세상의 운명까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어요. 눈물이 안 났거든요. 아파도, 슬퍼도…. 엄마가 그랬죠. 지독한 년이라고. 억울했죠. 눈물이 안 난다고 안 아픈 것도 아니고 안 슬픈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태어났을 때도 울지 않았대요. 숨을 안 쉬어서 바로 산소마스크를 썼죠. 태어나자마자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져 엄마 없이 한 달을 살았어요.”

그녀가 위로를 방주에 내려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누가 눈물을 흘리면 참 신기했어요. 눈에서 물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봤죠. 그런데 그러고 있으면 더 크게 우는 거예요. 저도 덩달아 슬퍼졌어요. 다친 데도 없는데 아팠고요.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비가 왔어요. 비를 맞으면 기분이 나아졌죠. 그래서 우산을 안 썼어요.”

나는 십자가 위로 올라가 가로대 오른편에 걸터앉았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럴듯한 농담이네요.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누군가는 물 위를 걷고, 누군가는 눈물 대신 비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가로대 왼편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옷에 묻은 핏물 같은 얼룩은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는다. 위로는 요람처럼 평온히 흔들리는 방주 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

“당신이 세상을 구한 거예요.”

아니, 나는 겨우 개 한 마리를 구했을 뿐이야. 여전히 누구한테도 도움이 되지 못했어.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소금쟁이보다 못하게 여길 것이고 그녀로 하여금 폭풍우를 불러일으키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고요한 밤바다 같다. 우리는 항해 중이고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었다. 고잉 메리 호의 돛대 위에서 보이지 않는 원피스의 섬을 응시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눈이 마주칠까 부끄러워 먼 데로 시선을 옮겼다. 어둠 저편에서 구명정 불빛이라 여겨지는 작은 빛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길을 안내하는 밤하늘의 별처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