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코끼리 (4/5)

by 걍마늘

“들어가자. 사무실에 난로 켜 놨어.”

서 주임이 초월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전화 없었어요?”

초월은 몇 시간째 홀로 삽을 휘두르고 있었다. 불처럼 달아오른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소방서도 경찰서도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소를 불러주었고 확인해 보겠다는 답도 들었으나 믿음이 가진 않았다.

“오늘이 영원이 생일이라며.” 서 주임이 삽을 뺏어든다.

“대체 영원이 아빠는 왜 여주까지 간 거야? 쉬는 날이지 않아?” 그러고는 눈더미에 삽을 꽂았다. 능숙하게 삽질을 했다.

“예전에 투표했을 때요.”

“투표? 아.”

“현숙 언니한테 불만이 많았거든요. 개인 사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들 조금씩 양보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언니는 너무 자기 사정만 내세우니까. 한 표도 안 나왔다면서요.”

서 주임은 묵묵히 삽질을 계속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어차피 현숙 언니한테 표를 줬어도 우리랑 같이 가지는 않았겠지만.”

정규직 전환 판결이 나기 직전에 인사에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추천 직원 세 명의 이름을 써내는 투표를 한 적이 있다. 한 표도 안 나온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바로 일을 그만두었고 그녀는 회사 밖에서 농성을 계속 이어갔다.

그녀는 무한과의 결혼을 지지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결혼에 있어 객관적인 조건은 없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단, 자신이 손해라는 감정보다 배우자가 있어 행복하다는 감정이 더 커야만 가능한 것이 결혼 생활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결혼의 필요조건은 행복이지만 행복하기 위해 결혼해서는 안 된다며 배우자로 하여금 자신에게 행복을 더해주길 바라지는 말랬다. 그것이 결혼의 충분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결혼은 또한 현실이었고 후회가 커진 만큼 그녀의 당부는 희미해져 까맣게 잊고 지낸 지 오래였다.

“갑자기 현숙 씨 얘긴 왜?”

“그냥요. 미안한 사람들이 생각나서요.”

“뚫렸다! 거의 다 왔었네. 인간 승리다, 인간 승리.”

서 주임이 삽을 건넸다.

“먼저 갈 테니까 전화기 찾으면 얼른 사무실로 돌아와. 얼어 죽겠어.”

그녀를 보낸 초월은 삽을 들고 거의 기다시피 해 눈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간신히 눈더미를 뚫고 나오자 이번에는 출입구 캐노피 지붕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다. 또다시 눈더미가 연결 통로를 막았다. 사무실로 되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초월은 그대로 드러누워 어지럽게 발광하는 눈송이를 바라봤다. 눈꺼풀 위로 떨어져 녹아내리는 차가운 눈을 감각한다. 이렇게 눈송이 하나는 하잘 것이 없는데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설마 이대로 끝나 버리지는 않겠지 희망을 갖다가도, 정말 그렇게 되면 어쩌나 공룡이 멸종했을 때처럼 천년만년 눈이 녹지 않으면 어쩌나 그래서 이대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면 어쩌나 가슴이 미어진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보통 등교할 때는 남편이, 하교할 때는 자신이 데리러 갔었는데 그날은 마침 남편이 집에 있어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하고 초월이 다녀오는 동안 무한은 묵은 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햇살은 눈부시게 맑았고, 나쁜 일은 하나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학교 현관 앞에서 아이를 찾는 엄마들과 엄마를 찾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아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만 해도 천국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난 텅 빈 현관에서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두리번거릴 때까지도 최악의 경우는 상상하지 못했다. 누가 무슨 일로 왔냐고 묻기에 반과 이름을 말해주었고 그가 일러준 대로 반을 찾아갔는데 교실이 텅 비어 있었다. 길이 어긋났을까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돌아왔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밤에 가만히 그러쥔 작고 통통한 손의 감촉이 생생한데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듯 갑자기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초월은 미친 사람처럼 동네를 헤매고 다니며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교통사고가 있었는지, 혼자 다니는 아이를 봤는지. 자신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지옥은 멀리 있지 않았다. 초주검이 되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놀랬지, 하며 아이스크림 앞에서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남편과 아이를 보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주저앉아 펑펑 운 것은 기쁨이 너무 커서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기적이 거기 있었다.

부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았다. 휴대폰을 봤다. 부재중 전화는 없고, 안테나가 뜨기는 했으나 연결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다. 충전 케이블을 휴대폰에 꽂았다. 다행히 아직은 전기가 들어온다.

라디오를 켰다. 튜너를 이리저리 돌려 제대로 소리가 나는 주파수를 찾았다. 그러자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듯 더운 나라의 사랑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를 죽게 만드는 날들은 셀 수 없이 많아요. 당신 없이, 외로이 내버려진 채. 하지만 내가 다른 삶을 원하는지 알고 싶다면, 아니요, 아니요. 나는 정말 살고 싶어요. 기다리고, 기다리며 당신을 삼키기 위해.”

《지구촌음악기행》은 영어권이 아닌 국가의 대중음악이라든가 민속음악, 그리고 다른 방송에서는 잘 틀어주지 않는 긴 연주음악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영어도 잘 모르는데 스페인어니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가사를 알아들을 리 만무했지만, 지구 반대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곳이 왠지 지방의 한적한 톨게이트가 아니라 한 세계와 완전히 다른 한 세계의 경계에 놓인 관문처럼 느껴졌다. 부스를 나와 한 발짝만 내딛으면 그곳이 리우데자네이루고 리스본이었다.

매머드 같은 트럭이 접안하는 배처럼 톨게이트로 들어선 것은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검은 돛배>가 흘러나오고 있을 때였다. 기타라 반주에 실린 씩씩한 여인의 음성이 부스 안팎에서 서라운드로 울려 퍼졌다. 초월은 요금을 계산하다 말고 운전석을 돌아봤다. 말총머리를 한 남자였다. 수염이 푸르스름하게 올라와 있었다. 거스름돈을 건네받은 남자는 초월과 카스테레오를 번갈아 가리키며, 뒤차 오면 갈게요, 하더니 슬쩍 소리를 키웠다.

연애를 인생의 돌파구로 생각한 적은 없다. 다짜고짜 반말을 하고 돈을 집어던지고 침을 뱉고 욕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는 아랫도리를 까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들을 보면서 연애라든가 남자에 대한 어떤 기대 따위를 버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검은 돛배>의 여인은 밤마다 바닷가를 거닐며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린다. 검은 돛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그는 소식이 없고 마을 사람들은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여인은 그와 함께한 추억들이 남은 바닷가에서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다.

파두는 숙명이죠. 피할 수 없는 운명이요.

파두(Fado)는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으로 ‘영혼의 노래’라고도 불렸다. 말번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르던 휴게소 자판기 앞 벤치였다. 누가 커피를 사겠다며 먼저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그러고는 휘파람으로 <검은 돛배>를 부르는 것이다. 믿음직스러운 하관에 자유분방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톨게이트에서 함께 음악을 들은 남자임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파도가 밀려들었고 그곳은 아무도 없는, 그러나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고독하지 않은 황혼의 백사장으로 변했다. 이 세상에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해변을 떠올리며 잠시지만 세상 밖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초월은 나란히 앉아 커피를 파시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잠깐 생각했다. 이 남자라면, 우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삶을 원하는지 알고 싶다면, 아니요, 아니요. 그칠 것 같지 않은 눈이 내리는 지금, 여러분은 누구와 계신가요?”

요금계산기와 LCD모니터와 인터폰과 늘어진 케이블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부스 안이 꼭 우주선 같다. 적막한 우주 한가운데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어느 시인은 노래했죠. 한겨울 못 잊을 사람과 한계령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고. 그것은 눈부신 고립이라고.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이고 싶다고. 폭설에 갇혀 홀로 스튜디오를 지키고 있는 지금, 청취자 여러분과 운명이 묶이고 싶은 마음으로 모든 신청곡을 틀어드릴 예정이니까요 #80….”

휴대폰을 들고 꽁꽁 언 손으로 눈밭에 발자국을 찍듯 신청곡과 사연을 썼다. 언제쯤 도착할지, 아니 과연 도착이나 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끝내는 가 닿아 희망 같은 것이 되기를 바라며, 인류가 쏘아 올린 보이저호처럼 우주 저편에 지구의 안부를 전하는 마음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