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갈 만한 책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하시더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근처에 사는 먼 친척이 이사를 하는데 책이 많아 처치곤란이라니 한번 다녀와 보라는 전화였다.
“근처에 친척이 살았어요?”
세상에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소설 쓴다고 할 줄 알았으면 그놈의 책 다 갖다 버릴 걸 그랬다고 술만 마시면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바쁘다, 시간 없다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말았겠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촌 누님이니까 너한테는 당고모가 되나?”
촌수를 헤아려 보았다. 아버지의 사촌이면 증조할아버지 대에서 갈린 자손이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는 해방 전에, 할아버지는 전쟁 중에 돌아가셨고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았기에 딱히 와 닿지는 않았다.
“월요일에 이사하신다니까 금요일까진 꼭 연락드리고….”
굴러다니는 크레파스를 집어 들고 아들의 스케치북에 아버지가 불러준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 부근이었다. 큰어머니 장례식 때 근처에 산다는 먼 친척 이야기를 얼핏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아 만난 적이 있는 분이냐고 물었더니 내 결혼식 때 왔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정신 챙기기에도 벅찬 날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조차도 왔는지 안 왔는지 확실치가 않았다.
통화를 마친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잠든 아들을 향해 돌아누웠다. 아들은 잠들기 직전까지 엄마를 찾았다. 속눈썹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러겠노라고 말은 했는데 볼 만한 책이 하나도 없으면 어쩌나 조금 걱정이 됐다. 얼굴도 모르는 친척 어른이 굳이 신경을 써 주었는데 예의상 한두 권 들고 가는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모처럼 내 생각을 해 준 아버지한테도 미안한 일이다. 그렇지만 또 잔뜩 들고 온대도 집이 좁아 놓아 둘 자리가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그러겠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잠시 후 우회전입니다.”
고등학교를 오가며 수없이 지나친 골목이었다. 어귀에 있는 구멍가게도 그대로다. 큰길은 눈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 그러나 큰길에서 갈라진 골목들은 들어갈 일이 없었기에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 익숙한 동네지만 생전 처음 와보는 곳처럼 낯설다.
“전방 삼십 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아들이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말을 따라 한다. 도서관은 월요일이 쉬는 날이고, 아내는 주말에도 일을 했다. 여전히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각자의 일로 바빴다. 아이를 볼 시간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찬바람이 왈칵 밀려든다. 아들이 그새를 못 참고 차창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목적지 부근입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핸들을 꺾었다. 신축 빌라가 경쟁적으로 늘어선 골목이다. 들은 대로 단독주택은 그 집 하나고, 높다란 담장부터가 그 재력을 짐작케 한다. 담벼락 옆에 바싹 차를 댔다. 시동을 끄자 세상이 침묵으로 뒤덮였다.
“챙겨갈 게 있으니까 아빠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차 안에서 기다려.”
하지만 아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안절부절못한다. 그제야 여벌옷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이밍을 놓치면 바지에 오줌을 쌀 수도 있다. 부랴부랴 차에서 내려 아들을 붙잡고 담벼락에 오줌을 누인다.
“집에 가자.”
아들은 바지를 올리자마자 나를 붙들고 칭얼댔다. 직장에 복귀한 아내는 출근 첫날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두 가지만 명심하면 돼, 설득과 인내. 그러나 그것은 가장 자신 없는 두 가지였다. 나는 두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잡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 책을 구조하러 가는 거야.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다 하늘나라로 가게 돼. 하늘나라 알지? 다시는 못 보게 된다고.”
물론 아이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평생이 고작 3년 반에 불과한 네 살배기가 죽음을 이해할 리도 만무했다. 다만 언젠가 놀이터에 두고 오는 바람에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 자동차와 생이별한 경험이 있고, 펑펑 우는 아들에게 슬픈 감정이란 그런 거라고 일러줬으니 다시는 못 보게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설득이 되었는지 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다, 고마워.” 차 트렁크에서 대형 장바구니 두 개와 책을 묶을 노끈과 아들의 장난감 비행기를 꺼냈다. 최근에 아들이 빠진 무동력 스티로폼 글라이더다. 아들에게 비행기를 건넸다.
대문은 열려 있다고 했다. 당고모와는 출발 직전에 통화했다. 아버지보다 어른이라 무슨 말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안부를 물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편하게 둘러보고 가라는 배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말에 따르면 고모부는 요양병원에 있었다.
문짝을 밀자 끼익하고 음산한 소리가 난다. 대문 안쪽은 녹음이 짙어 어둡고 서늘하다. 광처럼 보이는 창고가 있었고, 일단은 그 옆으로 난 돌층계를 올라야 했다. 바퀴 바람이 다 빠진, 타지 않은 지 십수 년은 되었음 직한 잔뜩 녹이 슬은 자전거를 창고 벽에 기대어 놓았다. 어디선가 새소리까지 들려왔다.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