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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Oct 26. 2017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아주 오래된 인연들

에스떼야에서 로스아르코스까지 | 22km

오늘은 좀 늦게 출발했다. 일어나니 Y누나는 거의 바로 떠났고, J군도 준비를 다해서 먼저가라고 한뒤, Y누나쪽을 봤는데 이미 가고 없었다. (빨리 출발했나보다)


오늘따라 몸이 가볍고, 가방을 메 봐도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가 않아서 아침으로 콜라한잔을 하고 느긋하게 출발했다.

생각보다 큰도시라서 도시를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차도 많아서 길찾는게 조금 힘들었다.

지나가던 주유소의 슈퍼에서 바게뜨를 하나사서 출발. 오늘도 바게뜨파워로 걷는다. 거기다 오늘은 공짜 와인, 와인수도꼭지가 나오는 날이니 안주 개념으로 챙겨갔다.

에스떼야로 부터 한시간을 걷다보면 나오는 Irache, 이곳에 와인수도꼭지가 있다.

이라체 지역의 와인업체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1일당 100리터를 제공하고 있다. 정말 물보다 와인이 싸다더니 와인이 그냥 공짜다. 신기한 스페인의 세계다.

난 와인한잔을 마시고, 페트병에 한병 가득 담아 걸어가면서 마시기로 했다. 이게 이렇게 나를 취하게 할줄은 몰랐지.

중간에 산길과 평지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예전의 나였으면 좀더 편할것만 같은 평지길을 선택했겠지만 특히 오늘의 나는 걷는데 자신감이 무한하게 붙어있었기에 산길을 택했다. 산에 오르면 뷰도 더 좋을거라 생각해서 일단 선택. 햇볕이 한창쌘 시간에도 산의 나무들 덕분에 시원해서 좋았다.


평지길을 선택해도 어짜피 언덕하나는 오르는데 그 언덕의 성당이 참 멋있다고 한다. 산길을 선택한 나는 그 성당을 보지는 못했지만, 높은곳에서 내려다 보는 뷰를 봤다. 그 뷰를 바라보며 먹는 공짜 와인이란.

끊임없는 산길을 걸어야 하고 앞뒤 아무도 없어서 심심했다. 나는 와인을 마시면서 걸어서 반쯤 취해있었기에 열심히 7080, 트로트, 발라드, 인디음악 등 장르 무관하고 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내려왔다. 마이크없이 노래크게 부르는게 얼마만인지.

산길을 내려와 처음 마주한 마을 Luquin, 이제 시간이지나 여유좀 부릴때가 됬다며 커피한잔 먹으러 간다.

이제 가방도 별로 무겁지 않고, 무서울게 없다는 듯이, 커피한잔을 들이키고 푹 쉬었다 간다. 여유가 생겼다. 몇일전까지만 해도 오래쉬면 더 힘들다고 잘 쉬지않곤 했는데 이제 매번 타파스 바 마다 한그릇씩 해볼까 싶다.

남은 와인을 들이키며 가는데 Y누나를 만났다. 아마 서로 다른길로 온것 같은데 나머지의 행방을 물었지만 모른다고 했다. 다들 어느길로 온거야...?

뜨거운 햇빛아래 당나귀가 열심히 짐을 나르고 있다. 라다크에서 짐나르는 수단으로 쓰던 동키가 떠올랐다.

그 동키들는 잘 지내고 있으련지. 아침마다 마주하던 그 느낌. 난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산길을 넘어왔더니 끊임없는 평원을 걷는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슬슬 걷기 힘들어진 나는 슬슬 걸음을 재촉했다.

열심히 걷고있던 찰나 지나가던 포도밭에서 한 농부의 친절을 받았다. 포도를 따고 있길래 Vino?(Wine?) 라고 물어봤더니 설명을 해주며 포도한송이를 주었다. 이집트나 터키의 포도가 설탕이라면 스페인의 포도는 깊은맛이 나는 느낌이었다. 진짜 맛있다.

로스아르코스에 도착했는데 이마을은 무슨 폐가들만 모여있는것 마냥 생기가 돌지않는다. 광장근처의 식당들만 영업하고 있고, 건물은 많은데 막상 상가나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괜히 머물기가 싫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Y누나, J군, L형님까지 전부 와있어서 씻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희우형님이 사주신 빠에야, 그리고 순례자메뉴의 러시안샐러드, 연어스테이크까지. 맛이없지는 않았으나 슬슬 순례자메뉴가 질려온다. 다음마을은 좀 다른걸 먹고싶다. 다음마을은 에스떼야에서 실패한 삼겹살을 꼭!!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L형님이랑 페이스북친구를 맺었는데 나랑 함께아는 친구가 40명가량 됬다. 그중의 상당수가 4년전에 참가했던 STAC(SmarTeen App Challenge)대회에서 알게된 인연들이라 여쭤봤더니, 알고보니 4년전 내 출품작을 심사하신분이셨다. 그렇다. 우린 알고보니 아주 오래된 인연이었다. 이 인연을 길위에서 만나다니. 세상은 정말로 좁나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숙소에만 있기 힘들어 다시 나와 맥주를 마셨다. 한국에서 여행나온 이야기, 계기나 동기, 한국생활의 힘든점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금세 밤이됬다.

숙소로 들어가는데 마침 성당 미사가 끝나는 시간이라 성당구경을했는데, 로스아르코스의 매력은 작은 마을의 성당에서 나왔다. 성당이 너무 예쁘게 되어 있었다.

신부님께서 순례자들에게 따로 기도도 해주셔서 나도 함께 기도를 드리고 왔다.

인연을 강제하지 않게 해주세요.
여유를 가지게 해주세요.

성당을 나오는 길에 십자가에 박혀있는 예수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다리에 꽃을 꽂아놨다. 심지어 생화였고 파릇파릇했다. 아마 누군가 주기적으로 교체를 하겠지? 정말 세심한 배려인것 같다. 피흘리는 부분을 꽃으로 가려놓다니.


오래된 인연을 만나 신기했던 날. 그날하루는 고등학생때를 추억하며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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