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 집시라즈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벽돌담이 둘러진 이층 양옥집이 있다. 파란 기와의 삼각지붕과 옅은 잿빛의 돌로 된 베란다가 어우러져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어른 키보다 조금 높은 담장 위에는 싱그러운 초록색 잎이 가득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파란 대문을 활짝 열고 뛰어들어가고 싶은 곳. 내가 어릴 적 살던 경기도 안양의 고향집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등나무집이라고 불렀다. 담을 빙 둘러 등나무가 둘러있고, 가지 덩굴은 이층 지붕까지 뻗어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벽돌담 위로 풍성하게 뻗은 등나무 덩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곤 했다. 아빠는 때마다 정성껏 등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툭툭 아빠의 가위소리가 들리면 하늘에서부터 등나무 잎사귀들이 떨어진다. 잔뜩 모아놓은 잎사귀 더미에서 아직 싱싱한 가지를 골라 모은다. 아빠가 가치지기를 하는 날은 하루 종일 등나무 잎으로 이것저것을 만들며 놀았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가지를 땅에 박아 벽을 만들고, 잎을 몇 개씩 겹쳐서 지붕을 엮어놓았다. 침대도 만들어 놓고, 의자도 만들고, 밥상을 차려 조심스레 밀어놓았다. 어슴푸레 노을이 지면 만들어 놓은 집에 요정이 올 거라고 상상하며 집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기다린 적도 있다.
등나무 집은 솜씨 좋은 아빠가 직접 설계를 한 작품이다. 내가 첫 돌이 되었을 때 이사를 해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등나무집에는 여러 군데 하자가 있었지만,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의 아빠는 부지런히 보수공사를 했다. 아빠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대문 위의 네모반듯했던 시멘트를 뜯어내고, 아치형 지붕을 만들었다. 덕분에 대문 위에 반달 모양의 빈 구멍이 생겼다. 학교에 다녀와서 아무도 없는 집에 문이 잠겨있으면 나는 그 빈 구멍으로 대문을 넘어 다녔다. 그리고 겨울이면 동파가 되고 추워서 다니기 불편했던 바깥 화장실을 집안으로 옮겨놓았다. 욕실 벽을 뚫어서 좌변기를 들여놓던 날, 아빠의 기발한 발상에 가족 모두는 즐거웠다.
소소한 추억도 있다. 부엌의 한쪽 구석에는 아주 작은 셋방이 있었는데, 쌀이며, 말린 고추 등을 넣어 놓는 창고로 쓰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동생들을 피해 조용히 공부하고 싶어 하는 둘째 언니의 공부방이 되었다. 거기는 창문도 작고, 불빛도 밖으로 새 나가지 않아서 마치 동굴 같았다. 에엥! 사이렌 소리와 함께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면 모든 집에 불을 꺼야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 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옹기종기 모여 밤새 수다를 떨었다.
부엌에서 이어지는 뒷마당에는 작은 빨래터가 있었고, 마중물을 넣어 펌프질을 하는 수도가 있었다. 여름이면 온 힘을 다해 위로 아래로 펌프질을 해댔다. 웩웩 쏟아지는 물소리와 남동생과 나의 웃음소리가 춤을 췄다.
지하에는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연탄 배달이 오면 대문을 활짝 열었다. 빨래판에 두 장씩 쌓으면 딱 맞았다. 하나라도 떨어뜨리면 불호령이 떨어지니 한발 한발 조심조심 날랐다. 지하실 한쪽에 검은색 연탄이 항상 쌓여있었다. 맨질맨질한 연탄이 나란히 쌓이면 한 번 쓱 문질러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까맣게 된 손을 씻기가 귀찮아 만지지는 않았다. 새벽마다 지하실로 연탄을 갈러 가시던 엄마는 기름보일러라는 신문물이 나오자마자 연탄아궁이를 바꿔버렸다.
이층은 넓게 뚫린 하나의 방이었고, 그곳에 오래된 장롱과 책상, 빨래 건조대가 있었다. 오래된 장롱에는 엄마의 안 입는 한복들과 철 지난 옷들이 걸려있었고, 나는 엄마 몰래 이층으로 올라가 신나게 패션쇼를 하곤 했다. 풍성한 한복 치마를 겹겹이 겹쳐 입고 빙그르르 돌다가 풀썩 주저앉으면 풍선처럼 부푼 비단 치마폭에 쌓여 마치 공주님이 된 것 같았다. 아무도 장롱 안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도 없었고, 이층 전체는 꼬마 아가씨의 완벽한 놀이터가 되었다.
그 집에서 제일 따뜻한 곳은 아랫목이었다. 그곳은 아빠 자리였는데, 항상 절절 끓었다. 경찰인 아빠가 당직서는 날에 아빠 자리는 먼저 전화를 받는 사람의 몫이었다. ‘아빠 당직이다’ 하는 전화를 받으면 엄마한테 달려 나가 ‘엄마 옆!!’을 외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빠 자리에서 자는 거다. 전화벨이 울리면 쟁탈전이 벌어졌다. 가끔은 전화를 받고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가 저녁식사시간에 언니들이 모이면 ‘내가 오늘 엄마 옆!’ 하고 외친다. 그러면 언니들의 아우성이 쏟아진다. 괜히 뿌듯하다. 아빠 자리라서 좋았을까? 엄마 옆이라서 좋았을까?
봄이면 라일락이 피었다. 연보라색의 탐스러운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안방 창문을 커다랗게 낸 아빠의 센스 덕에 안방 창틀에 걸쳐않아 밖에서 풍겨오는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 벽돌로 쌓은 작은 정원에는 등나무, 장미나무, 라일락이 있었다. 엄마는 정성스럽게 음식쓰레기를 비료로 주면서 그 나무들을 가꿨다. 그 덕에 등나무는 쑥쑥 자랐고, 라일락과 장미는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어느 날, 이모가 왔다.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아파트는 겨울에도 춥지 않고,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고, 집에서 반팔을 입을 정도라고 했다.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 해졌고, 아파트 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나는 등나무 집을 산 사람이 부러웠다. 그 사람은 집만 산 것이 아니라, 내 추억과 어린 시절의 모든 행복을 산 사람이었다.
주말마다 그 집을 보러 갔다. 등나무가 잘 있는지, 라일락은 잘 자라고 있는지 먼발치에서 확인하고 발길을 돌렸다. 어느 날, 집을 보러 갔는데,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집이 없다. 집이 철거되고, 건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내 기억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있는데, 눈앞에는 집이 없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뒤로 그 동네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은 얼마나 생생한지 지금도 그 집의 구석구석을 그릴 수 있을 정도다. 비록 현대식의 멋스러운 주택은 아니었지만 소꿉놀이를 하며 요정을 기다렸던 어린아이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그 등나무 집과 똑같은 집을 짓는 것이 소원이다. 나도 아빠처럼 집을 짓고 싶다. 예쁘게 등나무가 둘러진 등나무 집. 그 집은 꿈이고 추억이고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