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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부라이프 Apr 22. 2022

엄마는 주택이 싫다고 했다.

추억 속 집시리즈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1982 윤수일, 아파트   



1980년대는 강남 아파트 건설 붐이 일었고, 심지어 아파트라는 대중가요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70년대에 태어난 세대라면 ‘띵동 띵동! 빠밤빰~’하는 전주에 엉덩이 한번 들썩여봤을 것이다.  


강남의 아파트 붐은 경기도 안양에 살던 엄마에게까지 전달됐다. 겨울이면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찬바람이 들어오고, 수도는 얼고, 주택의 잡다한 일들에 지쳐가던 엄마에게 따뜻한 물도 콸콸 나오고, 외풍도 없고, 겨울에도 연탄 갈 일이 없는 아파트는 로망이었다. 평생을 종종거리며 악착같이 사느라 몸무게가 40킬로그램 언저리였던 엄마는 아파트로 가면 살이라도 찔 것 같다고 했다. 하긴 6녀 1남의 자녀들 뒷바라지만 해도 허리가 휠 지경인데, 주택이란 이곳저곳 신경 쓸 일도 많으니 오죽했을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사람 머리 위에 사람이 걸어 다니고, 사람 아래 사람이 사는 게 싫다. 그게 닭장이 아니고 뭐냐"하고 반대했다. 아빠는 결국 엄마의 고집에 항복했고,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된 해 1987년, 이사는 강행되었다.     


아파트 생활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라는 것도 처음 타보고, 그렇게 높은 곳도 처음 살아봤다.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 삼호아파트 13동 1501호.’ 지금도 기억하는 집주소다. 지금은 재건축이 진행 중이다. 우리가 이사한 곳은 아파트 단지 중 제일 끝이었다. 언덕 위로 올라가서도 제일 높은 곳, 15층짜리 아파트의 가장 꼭대기, 그리고 제일 가장자리 집이다. 거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앞에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고, 저 멀리 개발되지 않은 비닐하우스단지가 보였다. 다른 방에 있는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앞 동의 다양한 거실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빠 말대로 사람들 위에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 아래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밤이 되어 창문을 열고 훤히 보이는 남의 집 거실을 염탐하는 것은 꽤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낮에는 창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아무것도 막히지 않은 뻥 뚤린 하늘과 구름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시원해졌다. 높은 곳에 사니 하늘과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끝내줬다. 저 멀리 줄지어가는 차들의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과 그 너머 보이는 동네의 불빛은 까만 빌로드 천에 보석을 깔아놓은 듯했다. 산꼭대기에나 올라가야 볼 수 있는 야경을 집 베란다에서 보다니 꿈만 같았다.    

 


나는 꿈을 꿨다. 15층 꼭대기에서부터 날아오른 나는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몸이 붕 떠올랐고 아슬아슬하게 앞 동을 넘어갔다. 저 멀리 버스를 타고 갔던 동네가 보인다. 그곳까지 날아갈 것 같다. 마치 종이비행기가 된 것 같은 꿈이었다.   


   

엄마도 꿈꾸는  같다고 했다. 기적처럼 미분양된 집이   있었고, 아빠를 설득하기도 전에 계약을 진행했고, 중도금과 잔금이 착착 맞아떨어지게 준비되었던 과정을  번이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여전히 새벽마다 도시락을 싸고, 가족을 위해 종종거렸지만 ‘이라는 것을 누릴  있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벽장 안에는 라디에이터가 있었는데,  아래는 항상 따뜻했다. 엄마는 그곳에서 담요를 덮고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현관에서 들어오면 집안 쪽에 바로 보이는 그곳이 엄마의 아랫목이었다. 처음으로 침대에서 잠을 자던 , 이불을  개어도 된다는 기쁨과 ‘침대라는 신문물을 접한 흥분에 마음이 들떴다. 누가 촌스럽다고 할까  크게 티는  내고 이불속에서 계속 히죽거렸다. 방은 4, 가족은 7(언니 둘은 벌써 시집을 갔다). 부모님과 남동생이  한방씩 썼고, 당연히 자매들은 둘씩 같은 방을 썼다. 옷장 안을 어지럽히면 당장 불려  잔소리를 들었고, 마치 주인행세를 하는 언니가 얄밉기도 했다. 그래도  언니들이  ,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원형식탁에 둘러앉아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일상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며 깔깔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녀들은 차례로 결혼, 유학을 이유로 집을 떠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나만의 방을 차지할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을 그 집에서 보냈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그 집에서 살았다. 집은 잠깐 잠만 자는 곳이 되었다. 집에서의 시간보다 밖에서의 시간이 많아졌고, 집은 잠시 쉬었다가는 휴게소 같았다. 새가 둥지를 떠나가듯, 언니들도 나도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났다.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님과 남동생만이 그 집에 남았다. 처음 이사했을 때의 대궐 같던 집은 세월이 지나 낡아갔고 기적 같다던 엄마의 이야기도 빛이 바랬다.


10년도 넘게 살았던 아파트는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을 다른 곳으로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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