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 집시리즈 - 언덕길
내 인생의 첫 아파트에서 10대와 20대를 보냈다.
중학교 때는 아파트 단지 초입에 있는 독서실을 끊어놓고는 늦게까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별밤지기 이문세 아저씨 목소리에 취했고, 대학가요제에서 무한궤도가 대상을 탈 때 환호했다. 집보다 친구가 좋았던 시절, 공부를 핑계로 어둑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집의 안락함보다는 친구와의 개방정이, 집안에서의 소꿉놀이보다는 집 밖에서의 활보가 좋았던 시절이다.
집에서의 기억보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 상가, 주차장, 언덕길의 추억이 훨씬 많다.
그중에서 언덕길! 사랑했던 언덕길은 잊을 수 없다. 언덕 옆에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었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우거져 언덕 위를 덮었다. 긴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가지만 앙상했던 나무에는 연둣빛 새순이 돋아 싱그러웠다. 여름이 되면 진하고 풍성한 초록색 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줬고 가을이면 색색의 단풍잎이 찬란했다.
고등학생 때는 그 언덕길을 새벽마다 내달렸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여유 있게 걸어내려 갔으련만 꿀맛 같은 새벽잠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용수철처럼 튕기듯 일어나서 부리나케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저 멀리 스쿨버스가 오고 있다. 등에는 가방, 양 어깨에는 보온도시락을 하나씩 들쳐 메고 체육복 위에 교복 치마를 입은 여고생은 아침마다 꼬꾸라지듯이 언덕을 내달렸다. ‘아저씨!’를 부르며 구르다시피 뛰어내려오는 검은 그림자가 측은했는지 원래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스쿨버스 기사 아저씨는 항상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셨다. ‘내일은 여유 있게 이 길을 걸어가리라’ 다짐을 해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하교 후, 집에 갈 때는 스쿨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깜깜한 밤에 아파트 불빛이 비치는 언덕길을 여유를 만끽하며 어기적어기적 지그재그로 걸었다. 높은 언덕은 갖은 불평을 쏟아내는 하소연의 길이기도 하고, 찬양과 기도를 하는 위로의 길이기도 했다. 가방 속에 성적표가 있는 날은 그 언덕길이 더 길었으면 하고 바랐었다.
대학생이 되고, 연애를 하고, 정신없이 내 갈길을 가는 동안, 언덕길은 내내 거기 있었다. 10년을 매일같이 밟고 지나온 길. 집에 가려면 당연히 거쳐가야 하는 언덕길이 왜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로 돌아가 지그재그로 걸어보면 내 10대와 20대의 풋풋한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