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 집 시리즈
1998년, 24살의 나는 결혼을 했다. 언니 셋을 이미 시집보낸 베테랑 엄마의 진두지휘로 산본에 전셋집을 구했다. 그때는 산본에 신도시가 들어서서 신축 아파트가 꽤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24살의 철부지 아가씨는 ‘눈 뜨면 결혼식장’이란 말처럼 어느새 신부 입장을 하고 있었고 눈 깜박할 사이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이후 신접살림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짐가방을 들고 신혼집으로 갔다. 옆에는 남편이 있었지만, 왠지 이 집은 내 집이 아닌 것 같은 어색함이 있었다. 시댁과 친정에 인사를 다녔다. 시댁이야 원래 남의 집이니 신혼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정집에 갔을 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있었던 방, 화장실, 거실, 주방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제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곳처럼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제 너희 집으로 가라’하는 엄마의 말은 ‘이제 이곳은 네 집이 아니다.’ 하는 말로 들렸고,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제 삼시세끼 밥도 혼자 해야 하고, 빨래며, 청소도 다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새 살림에 대한 설렘보다 낯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남편은 회사를 가고 나는 이제 뭘 해야 하나? 집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낮잠을 자고. 그저 집과 친해지는 노력을 하며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신혼집은 23층의 복도식 아파트였다. 한 층에 세 집이 있었는데, 우리가 가운데 집이었다. 베란다에서 보면 앞은 뻥 뚫린 하늘이다. 친정집도 하늘과 가까웠는데, 신혼집은 더 가까워졌다. 현관문과 베란다 문을 열어놓으면 맞바람이 불어와 환기가 기가 막히게 잘됐다. 남향집이라 겨울에는 햇볕이 집안 깊숙이까지 들어오고, 여름에는 밝으면서도 시원했다. 집은 남편과 둘이 살기에 적당히 아늑하고 깔끔했다. 벽지는 모두 흰색이었고, 방 문은 옅은 회색이었다. 연한 색의 원목가구들과 오렌지색 천소파가 신혼집에 아주 잘 어울렸다. ‘아기 생기고 뛰어다니면 비싼 가구 소용없다. 나중에 다 바꾸게 될 거야.’라는 엄마 말에 동의하며 최소한의 것들을 장만했다. 안방은 장롱, 침대, 화장대, 건넌방은 서재, 작은 방은 잡동사니를 넣는 창고로 썼다. 청소를 하고, 가구를 요리조리 옮기고, 화분을 장만하고, 인테리어 소품들을 들여놨다. 음식을 해 먹고, 이곳저곳에 손때가 묻으면서 조금씩 여기가 내 집이라는 안정감이 생겼다.
휘리릭, 시간은 마법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두 사람이 살던 집은 다섯 식구가 사는 집이 되었다. 방방마다 아이들 물건과 장난감으로 가득 찼고, 새것이었던 가구들은 헌 것이 되어갔다. 신접살림이 두려웠던 새댁은 다섯 명의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아이를 엎고서도 거뜬히 손님상을 차릴 수 있는 프로주부가 되었다. 아이가 한 명, 한 명 늘 때마다 회오리바람처럼 정신없는 나날이었지만, 요령은 늘었고, 손놀림은 빨라졌다. 남편만 기다렸던 새댁은 어느새 질펀한 아줌마가 되었고, 어느새 동네 터주대감이 돼 있었고 집에서 8년을 살았다.
과거를 되짚어 보니 그 시간이 한 덩어리가 된 것 같다. 굳이 속 안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가 보일 듯 하나,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나. 내게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고, 친한 이웃들이 있었다. 더없이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결혼 몇 년차 까지를 신혼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신혼집에서 8년을 살았으니 그냥 나의 신혼생활은 8년이다!